1993-2006년
1993년 9월 13일 백악관 잔디밭에서 체결된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이스라엘의 이츠학 라빈 총리와 PLO 수장 야세르 아라파트가 악수를 했고,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이 둘을 양팔로 안았다. 세계 무대에서 대적들이 서로 화해하는 놀랍고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아라파트는 가자 지역과 여리고로 돌아 올 수 있게 되었다.
1년 후인 1994년 10월 26일 라빈과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남부 아라바 사막에 접해 있는 국경을 따라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요르단은 1979년 이집트 이후로 유대 국가와 평화 협정을 맺은 두 번째 아랍 국가가 되었다. 동시에 시리아와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평화는 번영을 가져왔다. 세계가 이스라엘을 칭찬했고, 아랍의 보이콧은 깨어졌다. 맥도널드, 토요타, 펩시 등 아랍의 압력에 굴복했던 세계적인 회사들이 이제는 돈벌이가 되는 이스라엘 시장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이스라엘에서는 또한 알리야 (이민)의 물결이 이어졌다. 전 소련 연방에서 50만명의 유대인들이 도착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땅을 양보한 것에 분노한 유대정통주의 유대인 이갈 아미르가1995년 11월 4일, 라빈을 암살하자 평화 협상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당시 외무부 장관이자 오슬로 협정의 설계자였던 시몬 페레스가 임시 총리가 되었지만, 1996년 선거에서 아라파트에게 더 이상의 양보를 반대했던 강경파 베냐민 네탄야후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네탄야후는 미국의 압력을 못 이겨 1997년 임시 평화 협상에서 성경의 도시인 헤브론 대부분을 팔레스타인측에 넘겨주었다.
이런 양보는 네탄야후의 우익 정당인 리쿠드 정부를 약화시켰고, 1999년 그는 전직 장군이자 온건파 노동당의 에후드 바락에게 패배했다. 2000년 5월 바락은 남부 레바논에서 모든 이스라엘 군인들을 철수시켰다. 1982년 제 1차 레바논 전쟁 이후 18년동안 계속된 주둔을 종결시킨 것이다.
그 후 바락은 아라파트와의 최종 평화 협상을 원했고, 클린턴은 2000년 7월 역사적인 캠프 데이비드 정상 회담을 위해 두 지도자들을 만났다. 바락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유대와 사마리아의 93%와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공유할 것을 제안했지만, 전부가 아니면 전무를 원했던 아라파트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두 달 뒤에 제 2차 인티파다 (봉기)가 팔레스타인 전지역에 걸쳐 폭동과 함께 일어났고, 버스와 식당등 이스라엘 사람들을 타겟으로 한 총격과 자살 폭탄 공격이 발생했다. 끔직한 테러의 물결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이 평화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가슴 아픈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슬로 협정의 붕괴는 바락 정부의 종말을 야기했고, 그는 2001년 2월 국민 선거에서 아리엘 샤론에게 철저한 패배를 맛보았다. 하지만 테러는 증가했다. 2002년 유월절에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범은 지중해 해안 도시 네타냐의 파크 호텔에서 유월절 세데르 식사가 한창이던 식당을 날려버렸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인 30명이 죽고, 140명이 부상 당했다. 이 테러로 이스라엘은 자살 폭탄범들을 제거하고 테러범들의 기반 시설들을 파괴시키기 위해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대대적인 군사 작전 ‘디펜시브 쉴드’를 실시했다. 그 후 이스라엘은 허점투성이인 국경을 폐쇄하고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보안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2004년 10월 아라파트는 심각한 중병이 들었고, 한 달 후 파리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장례가 있은지 1년 후 아라파트의 오른팔이었던 마흐무드 압바스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반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후임자로 있다.
2005년 ‘유대 정착촌의 아버지’로 불리던 샤론이 노선을 변경했다. 그는 그 해 여름 가자에 있던 21개의 유대 정착촌들을 철수시켰고, 8,000명의 유대인들이 고향에서 쫓겨났다.
2006년 1월 샤론은 치명적인 뇌졸중으로 쓰러져 현재까지 혼수 상태에 있다.
Picture - 갈릴리 호수에서 이츠학 라빈과 후세인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