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1992년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의 다른 전쟁들과는 달리, 1982년의 레바논 전쟁은 휴전으로 종결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군대가 이 나라의 반 이상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레바논에서의 목표를 이룰 수 없었다. PLO는 파멸되지 않았고, 튀니지로 추방되었으며,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이웃국가들에 대한 ‘새로운 질서’의 바램은 무산되었다.
이스라엘의 목표는 레바논에 본거지를 둔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의 로켓 공격을 중단시키고, 베이루트에 기독교가 지배하는 기독교 정부가 세워지는 것을 돕는 것이었다. 그 정권이 유대 국가와 외교 관계 맺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1982년 9월 메로나이트 기독교 대통령인 바키르 게마옐이 암살되면서 좌절되었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경제 위기를 맞았다. 리쿠드 정부는 자유 재정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1983년에 400%라는 엄청난 물가 폭등이 발생했다. 같은 해 은행과 주식 거래소의 위기는 이스라엘을 경제 혼란으로 몰아 넣었다. 항의와 데모가 이스라엘을 흔들었고, 많은 이들은 상황이 더 좋은 해외로 떠나갔다.
1983년 므나헴 베긴 총리의 사임 후 1984년 선거에서 리쿠드 당수 이츠학 샤미르와 노동당 당수 시몬 페레스는 4년 간 소위 ‘교대 정권’으로 국가 통치를 분담했다. 연합 정부의 첫 2년은 페레스가 총리직을 맡았고, 이후 2년은 샤미르가 맡았다. 이스라엘의 경제는 안정되고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인플레이션은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1988년 선거에서, 리쿠드가 근소한 차로 승리했고, 다시 연합 정부를 구성했지만, 이번에는 교대 정권은 아니었다.
1990년 3월에 샤미르의 연합 정부 파트너였던 페레스는 ‘비열한 술책’으로 정권을 끌어내리고 총리직을 맡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역풍을 몰고 왔고, 페레스와 그의 노동당은 정부에서 밀려났다.
1987년 12월 초에 제 1차 팔레스타인 봉기인 인티파다가 가자 지역에서 발발했다. 아쉬켈론과 가자 사이의 도로에서 이스라엘 트럭이 자동차와 충돌하여 세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한 교통 사고가 촉매가 되었다. 사고가 고의였다는 소문이 퍼졌고, 폭력 사태가 가자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 (소위 ‘서안 지역’)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정부나 군대 모두 전국적인 팔레스타인 봉기에 무방비상태였다. 중무장한 군인들이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청년들과 대치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의 이미지에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주고 말았다. 인티파다는 6년 동안 지속되었고, 1,600명의 팔레스타인 사람과 150명의 이스라엘 사망자들을 남겼다.
1991년 이스라엘은 또 다른 종류의 위협에 직면했다: 제 1차 걸프 전쟁 동안 이라크에서 발사된 39기의 스커드 미사일 공격을 받은 것이다. 사담 후세인과의 국제 공조가 무너질 것을 염려한 미국은 이스라엘에게 보복하지 말라고 압력을 가했고, 이스라엘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1992년 치러진 선거는 리쿠드의 샤미르와 노동당의 이츠학 라빈 전 장군의 대결로 이루어졌는데, 라빈이 대승을 거두었다. 리쿠드는 1977년 이후 처음으로 대권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라빈은 재빨리 ‘평화를 위해 땅을’이라는 원칙에 기초한 평화안을 제시하며 팔레스타인측에 양보들을 제안했다.
Picture - 인티파다: 제 1차 팔레스타인 봉기
암살된 바키르 게마옐
경제 상황에 대한 항의와 급등하는 인플레이션
교대 정권: 시몬 페레스 (왼쪽)과 이츠학 샤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