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이스라엘투데이

승리의 맛

1967-1973년

1967년 6일 전쟁 동안 이스라엘 군대는 구도시와 성전산을 포함한 동예루살렘과 성경의 중심 무대인 유대와 사마리아 (소위 ‘서안 지역’)를 점령했다. 아랍인들은 이것을 시온주의자의 ‘점령’이라고 하지만, 이스라엘 군대는 본래 이 지역들을 점령할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요르단의 후세인 왕이 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레비 에쉬콜 총리와의 약속을 어기고, 동쪽으로부터 공격을 감행하자, 이스라엘은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왕은 비극적인 패배를 당했다.

번개같은 공격으로 이스라엘은 시리아로부터 골란 고원을, 이집트의 시내 반도와 가자 지역을 점령했다. 예루살렘 재통합이라는 2,000년 간의 희망과 꿈이 실현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안감은 행복으로 바뀌었다.

이스라엘은 유리한 평화 협상을 위해 다른 영토들을 사용하려 했지만, 아랍 국가들은 협상을 거부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가자 그리고 골란에 유대인들을 정착시키기로 결정했다. 정착촌 운동의 선두에 선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국제 사회와 아랍 국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이 ‘점령 지역’에 정착하는 것은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전쟁 몇 달 후 유엔은 ‘평화를 위해 땅’이라는 개념을 잉태한 결의안 242를 통과시켰다. 당시 국무부 장관 윌리엄 로저스는 이 원칙에 기초한 미국의 평화 계획을 추진했지만, 이스라엘과 대화하려는 아랍 국가들을 찾지 못했다.

1969년 레비 에쉬콜이 죽고, 골다 메이어가 총리직을 맡았다. 이 시기는 폭발 직전의 시대였다. 에쉬콜이 죽기 몇 달 전인 1968년 말에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의 동부에 위치한 이스라엘 군대를 포격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엄청난 포격으로 변했다. 이스라엘도 포격으로 응사했고, 짧은 시간 동안 전면전으로 발전했다. 특별 기습 공격으로 이스라엘 군대는 이집트 측 운하에 있던 전략적인 전력망을 파괴시켰다. 마침내 1970년에 휴전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집트 국경이 조용해지자, 이번에는 요르단 국경이 가열되었다. 야세르 아라파트의 PLO가 요르단 측에 있는 요단강 동쪽에 기지를 건설하고, 요단강 계곡에 있는 유대인 정착촌에 연속적인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

이스라엘의 보복은 1970년 ‘검은 구월단’을 이끈 요르단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후세인 왕은 10,0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병사들을 죽이고, 아라파트와 PLO를 레바논 남부로 축출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테러 본거지를 세웠다.

PLO는 또한 해외의 이스라엘 시민들을 겨냥했다. 1972년 비엔나에서 텔아비브로 출발하는 사베나 비행기를 납치했고, 1976년에는 텔아비브에서 아테네를 거쳐 파리로 가는 에어프랑스를 공중 납치해 우간다 엔테베에 강제로 착륙시켰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특별 부대는 유명한 구조 작전을 펼쳤다.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 당시에는 PLO 테러범들이 11명의 이스라엘 운동 선수들을 살해했다.

테러 활동의 증가와 소모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놀라운 1967년 승리로 사기가 높아졌고, 1948년 건국 이후 최고로 안전함을 느꼈다. 이스라엘 군대는 시련에 맞섰고,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경제적으로 번영해 하나님의 은총과 신실함을 체험했다.

Picture - 사막 폭풍: 이스라엘 군대가 1967년 6일 전쟁 동안 이집트의 시내 반도를 점령하다 .

시온으로의 귀환! 약 2,000년 간의 유배 이후, 유대인의 주권이 성전산에서 회복되다 (1967년 6월).

이스라엘 편에 서서: 백악관에서의 친-이스라엘 시위 운동 (1967년 6월)

승리의 행진:이스라엘의 20번째 독립 기념일에 ‘통합된’ 예루살렘에서 탈취된 러시아제 이집트 탱크들로 퍼레이드를 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