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이스라엘투데이

계속된 전쟁: 1956-1967

1956년 11월 6일 영국과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 군대가 이집트의 시내 반도를 손에 넣고 시내 반도 전쟁을 종결시켰을 때, 이스라엘에는 큰 기쁨이 넘쳤다. 하지만 러시아와 워싱턴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압박으로 이스라엘이 100 시간의 전쟁을 통해 점령했던 모든 땅을 포기해야 하자, 기쁨은 실망으로 바뀌게 되었다. 1957년 3월에 이스라엘은 시내 반도와 가자 지구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 했으며, 유엔군이 일촉즉발의 이스라엘과 이집트 국경을 감독하기 시작했다.

이후 몇 년간 조용한 상태가 유지되었고 이스라엘은 경제 회복에 집중했다. 이 기간 동안 발생한 주목할만한 사건은 나치의 유럽 유대인 멸절 계획인 ‘최종해결책’의 고안자 아돌프 아이크만의 재판이었다. 홀로코스트의 잔해에서 부활하는 이스라엘을 연상시켜주는 감동적인 승리였다. 이 땅으로 이민 온 유대인 숫자도 증가해 1966년까지 300,000명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는 또한 초대 총리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다비드 벤-구리온이 사임하고, 레비 에슈콜로 대체되는 정치적 변화의 시기였다. 에슈콜의 임기 동안 이스라엘은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시켰고,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국가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갔다. 이스라엘은 발전된 세류 관계 기술을 공유하면서 농업 분야에서 개발 도상국들을 도울 수 있었다.

1964년에는 테러범들의 활동이 급증했다. 테러 단체들의 수장 PLO 조직이 창설되었고, 이집트를 통한 테러범들의 침투가 남부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북쪽 국경 지대에서는 큰 안보 문제가 국가적인 수로 건설과 함께 전개되었다. 시리아와 레바논이 요단강 및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갈릴리로의 물 흐름을 차단하는 사업을 진척시켰다. 이스라엘은 즉시 무력으로 대응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에 ‘물을 위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네게브의 디모나에 있는 이스라엘 핵원자로에 대해 우려하던 이집트는 시리아와 함께 긴장을 이용했다. 여섯 대의 시리아 미그기가 이스라엘과의 공중전으로 격추되자, 카이로는 다마스커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1967년 5월 15일에 이집트 군대는 유엔 평화군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은 채 시내 반도를 침입했다. 이것은 1956년 시내 전쟁 이후 맺은 휴전 협정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었다.

5월 17일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유엔 사무총장 유탄트에게 시내 반도에서 평화군을 철수 시킬 것을 요청했다. 사무총장은 즉시 역사적인 결정으로 응답했고, 이 일로 이스라엘은 유엔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이집트는 타이란 해협 봉쇄를 착수했고, 이스라엘의 홍해 항구인 에일랏으로 항해하는 것을 막았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공개적으로 전쟁을 준비해 이스라엘은 예비군을 소집할 수 밖에 없었다. 에슈콜 총리는 전 참모 총장 모세 다이안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했고, 1967년 6월 6일에 이집트를 마비시키는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이어서 요르단과 시리아에 대한 공격도 잇따랐다. 6일 전쟁은 예루살렘 구도시를 해방 시켰고, 유대 민족의 수도, 예루살렘의 재통합을 가져왔다.

Picture - 승리를 위한 길: 이스라엘 군대가 전투에서 귀환하고 있다 (Road to victory)

버스를 타다: 개인 차량이 보기 드물었다 (Take the bus)

밭가는 손길: 시온주의 노동자 (Hand to the pl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