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이스라엘투데이

국가 건설 (1948-1956)

이스라엘은 독립 전쟁에서 싸우고 있을 당시에도 이미 기초적인 정부 기관들은 형성되어 있었다. 선거가 치러졌고, 국회가 구성되었으며,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가 이끄는 신생 국가의 첫 정부가 세워졌다. 이 정부는 영국 위임 통치 이후 이 나라의 통치를 맡았다. 영국이 서둘러 떠나면서 권력을 체계적으로 이양하지 못한 탓에 국정 운영은 쉽지 않았다.

당시 엄청난 이민의 물결 (알리야)이 이 땅을 휩쓸었다. 1948년에서 1951년 사이에 700,000명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민 왔다. 이 숫자는 리비아, 예멘, 불가리아, 이라크의 유대인 공동체 전부를 포함한 것이었다.

1950년에 국회는 귀환법이라는 유대인 이민을 다룬 최초의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유대인 어머니나 아버지,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를 둔 사람은 누구나 시민권을 가지고 이 나라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민자들은 어려운 현실 가운데 도착했다. 독립 전쟁은 신생 국가의 경제를 심각하게 약화시켰고, 정부는 1948년과 1952년 사이에 긴축 재정 정책을 펼 수 밖에 없었다.

1952년에 독일과의 첫 배상금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이는 격렬한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6백만 유대인이 학살된 홀로코스트 이후 바로 독일과 관계를 맺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농업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말라리아를 번식하게 했던 북쪽에 위치한 훌라 분지 늪지대들에 기념비적인 정부 후원으로 배수 사업이 실시되었다. 오늘날 훌라 분지는 농업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철새들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이기도 하다.

키부츠 (공동 농장), 모샤브 (협동 농장), 개발 도시 등 새로운 정착촌들이 전국에 생겨났다. 도로와 전선망을 포함한 경제 기반 시설들이 구축되었고, 새로운 산업들이 건설되었다.

1949년 휴전 협정이 이루어진 후, 전쟁 동안 도피해 있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국경 안으로 잠입해, 처음에는 빼앗고 훔치다가 후에는 유대인들에 대한 테러 공격을 가하는 새로운 현상이 발생했다. 이러한 괴롭힘은1955년 2월 22일에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지배하고 있던 가자 지역에 군사 공격을 감행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검은 화살이라는 작전을 통해 이스라엘 군인들은 팔레스타인 공격을 도와주던 이집트 군 부대를 공격 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이집트인들은 아랍어로 ‘구원자들’이라는 뜻의 페다엔이라는 팔레스타인 군인들로 구성된 테러 단체를 조직했다. 이들 팔레스타인들은 가자 뿐만 아니라 요르단이 통치하고 있던 ‘서안 지역’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유대 공동체들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 국가들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 되었다.

이스라엘은 국제 사회에서 친구가 거의 없었고, 프랑스가 가장 가까운 동맹이 되었다. 이 두 나라가 상호 이익 및 공동의 적들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을 프랑스의 알제리 통치에 반대해 대중적 혁명을 일으킨 주된 세력으로 보았다.

1956년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는 도박을 감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도 격분했다. 1956년 10월 프랑스와 영국, 이스라엘의 외교관들이 파르 근처에서 만났고, 10월 29일에 시나이 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은 최초로 영국과 프랑스 군대와의 연합 전선을 통해 이집트 시내 반도를 점령했다.

불안과 갈등 속에서도 알리야는 계속되었다. 1955년과 1957년 사이에 160,000명의 유대인들이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이스라엘로 이민 왔다.

Picture 땅을 일구다: 시온주의의 이상

훌라 분지늪지들의 물을 빼내다

예루살렘에서의 독립 기념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