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이스라엘투데이

유엔 분할안에서 독립 국가로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이 땅과 해외의 시온주의 운동은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스라엘 국가를 위한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땅을 얻기 위한 싸움이 군사적으로는 하가나와 이르군 같은 유대인 무장 단체들을 통해, 외교적으로는 유대인의 고향에 대한 국제적 지지, 특히 미국의 지지를 받기 위한 노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편, 전 세계로부터 온 유대인 난민들은 영국 위임 통치의 팔레스타인 내로 계속 쇄도했는데, 일부는 합법적으로, 대부분은 불법적으로 들어왔다. 영국은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승리를 거둔 연합국에 속해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과거 당당했던 세계적 제국은 점차 사라져 갔다. 1947년 사방에서 증가되는 압력으로 영국 정부는 위임 통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이 문제를 새롭게 탄생한 국제 연합에 맡겼다.

이 주제는 팔레스타인에 관한 유엔의 특별 위원회 (UNSCOP)에 위탁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위임 통치의 종결을 권장했다. 영국은 이미 트랜스요르단에 아랍 왕조의 구역을 형성시키기 위해 위임 통치에 있던 요단강 동쪽 영토의 77%를 분할한 상태였다. 당시 UNSCOP는 남아 있던 23%인 요단강 서쪽 영토는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에게 분할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당시 계획은 이 땅 중 56%는 유대인 국가로, 42%는 아랍 국가로, 예루살렘 구도시 내부와 주위의 2%는 국제통치 지역으로 분할하는 것이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유대인과 아랍인을 위한 두 국가를 건국하는 181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투표 결과는 33대 13이었으며, 영국을 포함한 9표는 기권이었다.

시온에 있던 유대인들은 이 결정에 기뻐했지만, 아랍인들은 반대했다. 이 결의안은 영국 군대의 위임 통치 마지막 날이었던 5월 15일에 효력이 발생했다. 하지만 5월 15일은 샤밧이었기 때문에, 이슈브 (팔레스타인에 있던 유대 공동체) 지도자들은 샤밧이 시작하기 전인 금요일에 텔아비브에서 만나 유대 국가를 선언했다.

독립 국가 선언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땅은 유대인들의 탄생지였다. 이곳에서 그들의 영적, 종교적, 정치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국가를 이루었으며, 국가적, 세계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값진 문화를 만들었고 세상에 영원한 성경을 주었다.”

“강제로 땅에서 추방된 이후에도 믿음을 지켜 결코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오직 자신들의 정치적 자유의 회복을 바랐다. 이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애착에 이끌려, 유대인들은 세대를 거듭하여 다시 고대 고향에 정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 수십 년에야 그들은 다시 하나로 뭉쳤다… 그들은 사막에 꽃을 피우고, 히브리어를 부활시켰고, 마을과 촌락을 짓고, 경제와 문화 면에서 자립하여 번성하는 공동체를 구성했다. 평화를 사랑하나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알았고, 모든 국민에게 발전의 축복을 주었고, 늘 독립 국가를 추구했다.”하지만 24시간도 되지 않아서 아랍 국가들의 군대가 신생 유대인 국가를 침입해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