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이스라엘투데이

1948년 이후의 집단 이민

‘집단 이민’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이 나라로 들어온 올림 (새로운 이민자들)을 일컫는다. 이 물결은 주로 유럽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아랍 국가 출신의 유대인 난민들로 구성되었다. 18개월 동안 유대인 인구는 두 배로 증가해 1,300,000명에 이르렀다.

건국 이전 650,000명의 유대인 중 80%가 아쉬케나지 (유럽) 출신이었고, 20%만이 세파르딤 (지중해와 중동 국가 출신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집단 이민과 함께 변화가 있었다. 유럽과 미국 유대인들이 이민의 44%를 차지한 반면, 아랍 국가, 아프리카, 아시아 출신들이 54%를 차지했다. 1958년이 되자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은 개척 시대 당시와 비교해 이스라엘 거주 수치가 58%까지 떨어졌다.

1949년 6월에서 1950년 8월 사이 380번의 특별 비행을 통해 50,000명의 예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왔다. ‘독수리 날개’로 불렸던 이 작전은 또한 ‘마법의 양탄자 작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작전의 이름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출19:4). 이 작전은 종료 후에도 이민을 준비하던 예멘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 개월 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어떤 이들은 이 작전을 ‘메시아의 오심’이라고도 불렀다.

이스라엘 국가가 건국되자, 아랍 땅에 있던 유대인들은 갑작스런 큰 시련을 맞게 되었다. 이스라엘 국가 건국 이전에는 그 지역 유대인들이 이류 소수 민족으로 비교적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수 있었다. 하지만 1948년에는 약탈과 조직적 학살이 꾸준히 증가했다.

예멘의 유대 공동체에게는 경제적 불매 운동이 가해져 어려움을 당했다. 이스라엘은 중재 필요를 느꼈고, 항구 도시 아덴에 게울라 (‘구원’) 캠프를 설치했다. 당시 예멘을 통치하고 있던 영국은 1949년 초에 있었던 이스라엘 독립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대인들의 이민을 막았다. 영국의 통치 아래 최고의 권력을 가진 예멘의 이맘 아흐마드 이븐 아야는 유대인들의 이민에 동의했지만, 비밀유지와 전 재산을 남기는 조건하에 허락했다.

유대인들은 수 세기 또는 수 천년 동안 살아온 아랍 국가들을 떠나기 위해 아무런 보상도 없이 모든 재산을 포기해야 했다. 현재 이스라엘 정부는 이 사실을 유엔이 인정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랍 국가 출신 800,000명의 유대인 난민에 대해서는 이 세상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국제 사회는 팔레스타인 난민들만을 고려하며, 이들이 처음에 왜 이스라엘을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아랍 지도자들로부터 떠나라는 말을 들었다. 이 지도자들은 신생 이스라엘이 아랍 군대의 침략으로 파멸되면 집으로 돌아 올 수 있다고 약속했었다.

아랍 세계가 이스라엘에서 피난 온 700,000명의 아랍인들을 흡수했더라면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는 오래 전에 해결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유엔은 5백만 명의 난민들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대부분은 1948년에 도피한 700,000명의 자손들이다.

한편,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 출신의 800,000명의 유대인 난민들을 흡수했고, 번영된 국가를 이루었다. 암 이스라엘 카이! - 이스라엘 국민이여 영원하라!

Picture - 마법 양탄자 작전을 통해 예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