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이스라엘투데이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로

제 5차 알리야 (1929-1939년)

1929년에서 1939년까지 10년 동안 약 250,000명의 유대인 이민자들이 독립국가 이전의 이스라엘에 도착했는데, 대부분은 동유럽과 중앙 유럽 출신이었다. 이민을 하게 된 주된 이유는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뿐만 아니라 동유럽 전체에 반유대주의가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경제를 향상 시키기 위해 영국이 제약을 완화한 것도 알리야 (이민)를 촉진시킨 또 다른 요인이었다. 자본금으로 100 팔레스타인 파운드 (리롯)를 소유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취업이 보장된 유대인들에게는 성지로의 입국이 허락되었다.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이 땅에 들어오려고 했다. 많은 이들은 이미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결혼했고, 어떤 이들은 지역 대학에 입학을 한 반면, 일부는 육로나 해상을 통해 불법으로 잠입했다.

대부분은 큰 도시 중심지에 정착해서, 산업, 제조업, 은행, 보험에 자본을 투자했다. 이것은 초기 이슈브 (독립국가 이전 유대인 공동체)의 경제 번영을 도왔다. 소상인 및 사업가들뿐만 아니라, 의사, 변호사, 건축가, 음악가, 기자 등 전문가들도 일익을 담당했다. 하지만 다른 많은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 맞는 직장을 구할 수 없어서 건설이나 제조업 관련 직업을 택해야 했다.

카페, 레스토랑, 특산품 가게들이 전국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유럽 스타일의 패션이 인기를 끌었다. 문화생활 또한 오케스트라와 극장의 설립과 함께 향상되었다. 예를 들면, 바이올린 거장 브로니슬라브 후버만은 1938년에 이스라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창립했다. 이 기간 동안 고등 교육 기관들이 세워졌고, 1934년는 예루살렘에 하다사 메디컬 센터가 건립되었다.

하지만 도시의 삶이 발전할 수록, 초기 시온주의 개척자들의 상징이었던 농업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