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이스라엘투데이

흩어짐과 재집합

제4차 알리야 (1924-1931)

제4차 이민의 물결은 이스라엘 땅으로의 최초의 대규모 이민이었다. 약 7만 명 규모로, 대부분이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왔으며, 그다음은 루마니아와 리투아니아 출신이었다. 예멘과 이라크에서도 소수가 도착했다. 폴란드 유대인들은 경제적 위기와 중산층에게 부과된 큰 세금부담 때문에 그 나라를 떠났다. 당시 폴란드 재정부장관이었던 발디슬라브 도미니크 그라브스키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들의 대규모 이민에 가장 큰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그라브스키의 알리야’라고 부른다.

유럽에서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가 성장한 것 또한 많은 유대인들을 성지로 향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1923년 국제연맹은 트랜스요르단 아랍 국가를 만들기 위해 위임 통치하던 영국이 유대인과 아랍 국가로 예정된 팔레스타인 땅의 75%를 ‘잘라내는 것’을 허락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시온주의에 대한 세계 국가들의 명백한 지지는 제4차 이민의 물결에 도움을 주었다.

사실, 유럽의 유대인들은 미국으로 이민 가기를 원했지만, 1924년 국회에서 통과된 법은 새로운 대규모 이민을 막았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영국이 위임 통치하는 팔레스타인으로 이민을 갔다. 이런 상황은 1989년에 그대로 반복되었는데, 소련 연방을 떠나는 유대인들은 미국으로의 이민을 원했지만, 이스라엘로의 출국 비자만을 받았다.

초기의 이민 물결과는 대조적으로, 4차 이민자들은 대부분 동유럽 출신의 중산층 유대인들이었고, 많은 이들이 무역과 산업에서 종사하며 시온주의 운동을 개척해 나갔다. 그들은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텔아비브 같은 도시에 정착하고자 했다. 10명 중 8명은 도심에 있는 주택을 선호했고, 키부츠 (집단 농장)와 모샤브 (협동 농장)에는 무관심했다. 1925년 텔아비브에는 40,000명, 하이파에는 14,000명의 유대인이 거주했다.

1926년 경제 위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 땅을 떠났기 때문에 4차 알리야는 적기에 일어난 것이었다. 1924년 산업 분야에서 46번, 다음해에는 61번의 파업이 일어났다. 노동자수가 급증하면서, 고용주들과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던 고용인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1928년에 이르러서야 이런 위기가 진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