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이스라엘투데이

시온으로의 귀환

제3차 알리야 (1914-1918)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중단된 2차 알리야는 전쟁이 끝나면서 3차 알리야 (이스라엘로의 이주의 물결)로 이어졌다. 약 35,000명의 유대인들이 3차 알리야 동안 에레츠 이스라엘(이스라엘 땅)에 도착했다. 그들은 주로 러시아와 폴란드 출신이었고, 소수는 리투아니아와 루마니아 출신이었다. 동유럽 유대인들의 삶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힘들어지자, 약속의 땅, 푸른 목초지를 찾아 떠난 것이다.

영국이 시온주의 운동과 팔레스타인 땅에서의 유대국가에 지지를 보낸 발포어 선언은 알리야의 증가를 가져왔고, 더 많은 유대인들을 성경의 땅으로 이주하도록 했다. 이것은 특히 러시아와 폴란드의 할루츠(개척자)와 동유럽의 하쇼메르 하짜이르(청년 파수꾼) 같은 시온주의 운동 출신 청년들에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가장 오래된 시온주의 운동 하쇼메르 하짜이르는 ‘시온주의 청년을 위한 세계 운동’으로 알려졌다. 이 조직의 주요 목표는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유대국가를 설립하기 위해 해외에 살고 있는 젊은 세대들을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제2차와 3차 이주민들은 시온주의 이상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특히 3차 이주민들은 시온주의 개척자들이 이미 기반을 다져놓은 공동체에서 보다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1917년은 오스만 터키가 400년 동안 통치하던 팔레스타인을 영국이 차지하게 되면서 전환기적인 시기가 되었다. 영국 위임 통치는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팔레스타인으로 온 유대인들은 이주 과정에서 새로운 권력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이스라엘 땅에 있던 유대 공동체 이슈브는 국가 기관들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노동 조합인 히스타드룻과 하가나(방어)로 알려진 건국 이전의 군대 조직, 준 군사단체인 이르군(조직), 학교, 병원들이 설립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키부침, 즉 사회주의적 집단 농장들이 생겨났다. 하키부츠 하메우하드(연합 키부츠)로 알려진 최초의 키부츠 운동은 1927년에 설립되었다.

다음호: 제 4차 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