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차 알리야 (1904-1914)
대부분 러시아와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35,000명으로 이루어진 두 번째 알리야(이민)는 중요한 이민의 물결을 일으켰다. 그들의 동기는 1882-1903년 제 1차 알리야를 한 사람들의 동기와 유사했다; 주된 목적은 현대 유대국가 창설이라는 시온주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시온으로의 귀환 운동 대부분은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 학살이나 과격한 반유대주의 때문에 일어났다. 하지만 1914년 제 1차 세계 대전 발생으로 이스라엘 땅으로의 이민은 중단되었다.
이민자들 중에는 랍비 아브라함 이삭 쿡이 있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영국 위임 통치 기간 최초의 최고 랍비이자, 종교적인 시온주의 예쉬바 메르카즈 하라브의 창시자이다. 그는 1904년에 이스라엘에 왔으며, 현대 종교적 시온주의의 영적인 아버지로 인식되고 있다. 랍비 쿡은 토라 연구에 선행 겸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같은 해에 이 땅의 유대인 숫자는 85,000명에 이르렀다.
첫 번째 알리야와는 다르게, 두 번째 알리야는 주로 젊은 미혼으로 이루어졌다. 그들 대부분은 관념적 사회주의자였는데, 유대 국가 건설을 통한 국가적 구원을 추구했다. 가족이 있는 성인들은 도시에 정착하는 성향을 보인 반면, 청년들은 주로 모샤빔 (협동 농장 공동체)에 합류하여, 최초의 알리야 때 도착한 농부들과 함께 육체 노동을 하며 이 땅을 일구었다.
제 2차 알리야는 또한 알리야 운동인 하포엘 하짜이르 (청년 노동자)의 끈질긴 요청으로 예멘에서 이민 온 유대인 가족들이 포함되었다. 그들은 최초의 알리야 당시 도착한 예멘 가족들과 합류하여 예루살렘과 지중해 항구 도시 자파에 정착했다. 당시 예멘 유대인들은 높은 교육을 받고 더 나은 일자리와 기술을 가진 유럽의 유대인들보다 새로운 문화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두 번째 알리야 이민자들은 키부침 (사회주의적 농장 공동체)을 시작했고, 1909년에 최초의 현대 히브리 도시인 텔아비브를 건설했다. 그들은 또한 이슈브 (정착촌)를 위한 자위조직 하쇼메르 (‘파수꾼’)를 창설했다. 그들은 서서히 정당, 보건 의료 기금, 노동 조합, 학교 등 국가 조직들을 세웠고, 약 2,000년 만에 히브리어를 일상 생활어로 부활시켰다.
제 2차 알리야 때 이민 온 예술가, 작가, 저널리스트, 지식인, 전문가들은 이스라엘 대중 언론 매체와 문학의 기초를 다졌으며,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