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이스라엘투데이

이스라엘: 우연인가? 약속의 성취인가?

최초의 알리야 (1882-1903)

19세기 중반과 1882년, 에레츠 이스라엘 (이스라엘 땅)로의 알리야 (이민)의 최초의 물결이 있었을 당시,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네 개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 사페드, 티베리아스, 헤브론에 살았다. 당시 모스코바에서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과 추방은 러시아 유대인들이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했다. 분명 이방인들이 언급했던 것처럼 ‘유대인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성서의 땅으로의 대규모 귀환뿐이었다. 이후 20년 동안 25,000명의 유대인들이 러시아와 루마니아에서 이민을 왔고, 2,500명은 예멘으로부터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루마니아에서 탈출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보다는 미국에서 정착했다. 에레츠 이스라엘은 대개 중산층 유대인들과 대가족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다. 농업 지식과 경험이 거의 없던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예루살렘과 야포 (Jaffa)에 정착했고, 네 명 중 한 명만이 경작했다.

예멘의 유대인들은 영적인 자각이 공동체에 퍼지면서, 메시아에 대한 소망으로 이 땅에 왔다. 이들 대부분은 통곡의 벽 근처 구도시의 분문 반대편 예루살렘 지역에 거주했다. 그들은 부족한 수입으로 가난하게 살았고, 종종 아랍 이웃들과 갈등을 겪었다.

당시 전원 농업 정착촌의 일반적 형태는 모샤바였다. 공동 생활을 하는 모샤브나 키부츠와는 달리 모샤바 내 소유지와 농장은 개인이 소유했다. 28개의 모샤봇 중 가장 북쪽에 있는 것은 레바논 국경에 위치한 메툴라이다. 그 외에도 페타크 티크바, 리숀 레찌온, 게데라, 에크론, 지크론 야콥, 로쉬 피나, 예슈드 하말라, 가장 남쪽에 있는 브에르 투비아가 있다.

강한 개척 정신과 공동의 비전을 위한 희생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불모의 땅을 개간하기 위해 애썼던 초기의 많은 모샤봇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그들은 프랑스의 바론 에드몽 드 로스차일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들을 도와 건설된 포도원과 포도주 양조장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번창하고 있다. 지크론 야콥에 위치한 카르멜 양조장은 매우 유명하다.

‘현대 히브리어의 아버지’로 알려진 엘리에젤 벤 예후다도 최초의 이민자들에 속해 있었다. 1903년까지 에레츠 이스라엘의 유대인 인구는 40,000명에 이르렀다.

Picture - ‘그들은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