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 중에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 사도 바울, 성 어거스틴, 마틴 루터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에만 은혜가 나타났기 때문에 유대 신앙에는 없다고 믿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창 6:8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노아와 구원에 대해서 말해준다. 사실 심판 [예를 들면 홍수]과 은혜 [구원 또는 구출]는 성경 전체에서 널리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심판과 은혜를 대비해 말씀한 슥12:9-10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이방 나라들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게다가 언약 궤는 속죄일 욤 키푸르처럼 속죄의 장소라는 뜻인 ‘하-카포렛’이라고 불린다. 욤 키푸르 때 폐회 기도처럼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은총을 약속하셨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민14:19-20)
은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헨과 헤세드 두 개가 있다. 헨은 심판의 반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헤세드는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용된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시103:11); 그리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시103:17).
유대 교훈에 따르면, 은혜는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 은혜는 죄인을 변호해 준다. 메시아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구약을 철저히 이루신 것이다.
은혜는 의로운 행위로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이나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없애준다는 말은 아니다. “할렐루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셨다!”라고 외치고 나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법이 은혜와 반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려고 계명을 주셨고,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기만 하면 은혜로 용서하신다.
탈무드는 은혜인 헨과 헤세드를 주전 500년에서 주후 500년 당시의 유대 사고를 통해 해석한다. ‘호의’라고 번역되는 헨은 사랑과 안전의 느낌을 준다. 헨과 ‘무릎’이라는 뜻인 헤크 사이에서 파생된 유사함은 부모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작은 아이처럼 우리를 품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준다.
‘은혜’라는 뜻의 헤세드 히브리어 단어는 ‘친절’과 ‘사랑' ‘자비심’의 의미를 가진 갈대아인 히쉬두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헤세드는 인류를 향한 자비로운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신7:6-8).
이 사랑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위협적인 심판을 연단과 용서, 치유로 바꾸신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런 은혜 덕분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나라이다. 고대부터 존재해 온 은혜는 유대인 메시아이신 예수를 통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