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특별한 계시 - 즉, 토라 - 없이 모든 인간에게 알려진 바 되었다는 사도 바울의 언급은 매우 유대적인 것이다. 이것에 대한 무지는 기독교 주석이 바울의 지식과 영감의 원천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종종 자신의 생각이 유대 신앙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속성들’에 대한 생각은 유대인의 신비주의에서 10개의 신성 개념과 유사한데, 바울처럼 유대인의 신비주의적 전통은 하나님께서 지혜, 이해, 자비와 능력과 같은 속성들을 통해서 하나님 스스로를 나타내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통해 볼 때, 바울은 유대인의 신비주의적 사고의 토대가 되는 책 조하르의 저자로 알려진 시몬 바르 요카이 랍비 이전에 살았다.
천지창조 이후 세상에 작용한 하나님의 속성들은 시내산 율법 수여 이전부터 있었으며, 이는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인간들에게 밝히신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자비의 속성은 인류에게 친절에 대해서 가르치며, 사람들이 연민을 가지게 한다. 중요한 유대 사상인 데렉 에레츠 (이 땅의 법도)도 이와 유사하게 토라와는 상관 없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서 말한다. 아브라함은 토라가 주어지기 오래 전에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시내산 사건 이전에 살았던 이삭이나 야곱, 다른 성경의 인물들 또한 그렇다.
오늘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데렉 에레츠를 예의 범절이나 기본적인 인간의 예의를 일컫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인간의 독특성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도덕성과 말하고, 분별하고, 탐험하고, 조사하고, 생각하고, 창조하고, 이해하고, 정교하며 지속적인 문화를 이루는 능력들은 모두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속성들을 통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간으로서 아담의 첫 번째 중요한 행동은 모든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이었다. 이것은 개별 및 전체적인 생물들에 대한 깊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주목할 만한 과학적 업적이었다. 오늘날의 평가 기준으로 볼 때, 아담은 동물학 노벨상 후보자인 것이다.
바울은 인간이 만물을 주목하여 보는 것을 통하여 창조주를 알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구별하고, 이 차이로부터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는 ‘선천적인’ 인간의 능력이라는 의미에서 데렉 에레츠를 암시한다. 이러한 ‘땅의 법도’를 거부하는 것은 이치를 아는 도덕적 신분에서 짐승과 같이 되는 퇴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현인들이 데렉 에레츠가 토라보다 앞선다고 가르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르 카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토라의 모든 중요한 원칙들이 의존하고 있는 짧은 본문이 무엇인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3:6]” (베라코트 63a).
‘범사에’를 ‘땅의 법도’ 즉, 인간답게 존재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어떤 유대인이 인간답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토라와는 아무 상관 없는 자이다. 사람들은 인간성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바울과 현인들에 따르면, 이를 무시하는 행동은 사회와 문화를 쇠퇴시킨다.
Picture - 하나님의 창조: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창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