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 근처에 계셨을 때, 어떤 사람이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성전세를 내시는지 물었다. 모함을 피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보내 고기를 잡도록 하셨다. 베드로는 후에 ‘베드로 물고기’로 불려진 물고기의 입에서 동전을 발견해, 자신과 예수에 대한 성전세를 지불한다(마17:24-27). 이 사건 이후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가장 큰 자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아마도 왜 베드로가 이 기적의 물고기를 잡는데 선택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서로 매우 달랐다. 베드로는 쉽게 흥분하고 쉽게 낙담했다. 마태는 뛰어난 관찰자였다. 야고보와 요한은 하나님 나라에서 장관이 되고 싶어했다. 빌립은 헬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 뱃새다 출신이다. 나다니엘은 성실하고 정직하며, 도마는 굉장히 의심이 많았고, 회계를 맡았던 유다는 투기꾼 기질이 있었다 (마3:13-19). 이런 다양한 성격들은 제자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켰다.
오늘날은 어떨까? 사람들은 기독교 집회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모두가 형제’라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사진에 찍힌 모습들을 보며 “그 사람은 너무 나이 들어 보이지 않나?”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 뭔가?” 라며 판단하곤 한다.
때때로 나 또한 ‘내가 가장 크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낀다. 또한 내가 겸손하게 이것을 인정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도리어 이런 자부심은 사실 내가 겸손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누가 가장 큰 자인지에 대해 다투고 논쟁하는 제자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마18:1-5).
예수께서 작은 아이를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것은 아이들이 아버지를 믿듯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꾸밈 없고 겸손한 모습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생각나게 한다. 생계를 염려하고, 우둔하게 보이기를 원치 않았던 어른들은 “임금님의 옷은 정말 아름답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때 한 아이가 소리쳤다 : “그런데 임금님은 벌거 벗었잖아요.”
이라는 영화 또한 사회적 타부를 드러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장애인 백만 장자를 속여 캔버스에 붉은 얼룩만 있는 애매한 그림을 사도록 설득한다. 그 때 그 부자의 간병인으로 보이는 촌스러운 한 흑인 남자가 무심코 말한다, “이런 코피 흘린 것 같은 그림에 40,000달러를 쓰신단 말이에요?”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속을까? 다른 이들보다 더 위대한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거짓 탈을 벗기기 위해서는 왕이 벌거벗었다고 밝힌 아이나 간병인과 같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들은 종교적 위선을 신성한 사역으로 바꾸어 주는 진실한 선각자들이다.
진정한 제자는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알며, 가장 큰 자가 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모든 업적은 자신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총임을 아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