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이스라엘 땅에 있던 유대인 통치자들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대신 지배자나 영주로만 불리도록 허락했다. 따라서 유대인 제사장들이 예수가 왕이라는 주장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한 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요19:15).
한편, 로마는 정복한 국가들의 국내 정세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관료들은 황제 (시저)에게 조공을 바치는 한 자신들의 관직을 문제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로마 당국은 인구 조사를 통해 세금 징수자 명단을 만들었지만, 세금징수 업무는 유대인 통치자들에게 일임했다. 좋은 예가 성탄절 기사에 등장하는 수리아의 로마 총독이었던 구레뇨이다(눅2:2).
로마 총독이 대제사장의 임명과 면직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은 필연적으로 로마에 대한 충성도에 따라 선택되었고, 대부분은 1년에서 2년 정도 관직에 머물렀다. 하지만 예수의 재판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대제사장 아나니아 (주후 6-15년)와 그의 사위 가야바 (18-37년)는 좀더 오래 관직을 유지했다.
로마는 제사장의 관복을 보관하는 총독을 통해 지속적으로 상황을 감독할 수 있었다. 따라서 대제사장이 정식 관복을 입고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은 로마의 협력자를 목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등장할 때마다 로마와 예루살렘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분명한 신학적 관점들은 1세기 랍비 힐렐과 샤마이, 그리고 경외와 존경을 받았던 랍비의 스승이자 정치가인 가말리엘에 의해 세워졌다. 힐렐 (주전 30년-주후 15년)은 온화와 평온, 그리고 자신의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그의 가르침 중 많은 부분은 예수의 말씀을 연상하게 한다. 이와는 반대로 샤마이 - 그 또한 예수와 동시대 사람 -는 율법의 엄격성을 표현했다. 가말리엘 또한 1세기 전반기 동안 가르쳤는데, 후에 사도 바울이 된 다소 사람 사울도 그의 문하생이었다 (행22:3).
이 당시 존재했던 또 다른 종교 단체는 사해의 두루마리 덕분에 알려지게 된 금욕주의적 종파 엣세네파이다. 그들은 사해 근처 쿰란 동굴에서 금욕주의적 은둔생활을 했다. 에세네파는 또한 예루살렘에 거주 지역을 이루고 있었는데, 오늘날 시온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엣세네파의 가르침을 따르시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그의 생애 기간’ 동안 이 종파와 함께 보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많은 종교적 운동들이 있었고, 예수께서 30세에 대중에게 나타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 분을 단순히 많은 구원자적인 설교자 중 한 명으로 인식했다. 이들 설교자들 중에는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 자들도 있었다. 복음서에서도 증거하는 것처럼, 예수는 당시 많은 다른 종교적인 선생들과 유사했다.
예수의 공생애 기간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주후 14-37년)의 통치 기간이었는데, 당시 본디오 빌라도 (주후 26-36년)가 유다 총독으로 있었다. 예수의 사역에 관한 성서 이외의 증언들은 유대 작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주전 20-주후 40년)의 글과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주후 37-100년)의 작품 Jewish Antiquities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요세푸스의 경우, 예수의 행적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고, 예수에 대한 그의 모든 기록은 초기 유대인 기독교인들이나 다른 2차 자료에서 나온 것들이다.
성인기의 예수께서는 유대와 그 백성들 가운데서 그들의 가르침과 정치 체제하에서 사셨다. 복음서를 최초로 세계화 시키고, 이방인들을 설득시켜 메시아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도록 복음을 어느 정도 ‘탈유대화’ 시킨 사람은 바울이었다.
힐렐 (주전 30년-주후 15년)은 온화와 평온 그리고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그의 가르침 중 많은 부분은 예수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2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