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이스라엘투데이

예수 시대의 정치와 종교

제 1편 (총 3편)

초기 바벨론 시대에는 기록들을 쐐기 문자 토판에 기록했다. 예수님 시대에는 소식들을 양피지에 기록했으며, 여행하는 상인들이나 순례자들이 이 소식들을 다른 곳으로 전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의 주민들은 예루살렘이나 가이사랴에 있는 사람만큼 정보를 잘 접할 수 있었다. 유다와 사마리아, 갈릴리가 로마의 점령하에 놓인 이후로 사람들은 또한 로마와 로마 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예수님 시대로 여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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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의 시간으로 결정되는 기독교 달력의 ‘0’이 되는 해는 유대 달력으로는 천지 창조 (창1장) 이후 3761년이 되는 해였다. 유대력으로 올해는 5772년이 된다. 메시아 이후 시간은 “그리스도 이전 및 이후” (주전 또는 주후)로 표현된다. 예수께서는 주전 37년부터 4년까지 통치했던 헤롯 대왕이 죽기 얼마 전에 태어나셨다. 헤롯이 권력에 올랐다는 소식은 그가 건축에 능통한 천재이며 잔인한 괴물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중요한 뉴스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로마의 하수인으로 의심했다.

유대인 로마 역사가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은 성전을 확장, 보수했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의 눈에 그는 악당으로 남아 있었다. 그에게는 유대인의 피도 흐르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을 증오하던 유대인 하스모니안 공주 마리암메와 결혼했다. 질투에 사로잡힌 헤롯은 결국 그녀를 살해하고 만다. 그는 마치 그녀가 살아 있는 것처럼, 그녀를 소환한 그의 궁정 (다윗성)에 하인들을 계속해서 두게 하는 광기를 보였다. 헤롯의 분노은 너무 깊어서 마리암메가 낳은 자신의 두 아들마저도 살해했다. 이 사건들은 당시 “헤롯 곁에서 그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 돼지가 되는 것이 더 낫다.”라는 유행어를 낳았다.

예수의 어린 시절 당시 사회는 누가 헤롯의 뒤를 이을 것인가에 대한 혼란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스라엘 땅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살아남은 헤롯의 세 아들들에게 할당하라고 명했다. 아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메를 받았고 안티파스는 갈릴리를 그리고 빌립은 갈릴리를 접경으로 한 북쪽과 동쪽 지역을 얻었다.

하지만 평화 대신에 이스라엘에 되돌아 온 것은 페리아의 시몬, 거인 목자 아트론게스, 열심당원 유다스와 같은 모반자들이 사람들을 자극해 로마에 대항하게 만든 반란뿐이었다. 이러한 반란은 시리아의 통치자 배루스에게 진압을 당하고 만다.

이 같은 상황은 비록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이 목가적인 풍경의 장소였지만, 그 분께서는 헤롯의 둘째 아들 안티파스가 통치했던 불안한 시대에서 성장하셨음을 알려준다. 안티파스의 첫 번째 아내는 이교도 나바티안의 왕인 아레타스의 딸이었지만, 그는 그녀와 이혼하고, 이복 형인 헤롯의 아내 요부 헤로디아스 (마14장 참고)와 결혼했다. 따라서 나사렛의 우물 가에서는 수 많은 가십 거리들이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더불어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이 나란히 존재했는데, 그들은 전역에 교사들을 보내어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부활을 믿지 않던 사두개파 사람들은 헬라 문화를 장려했다. 그들의 정적이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었고, 토라를 엄격하게 준수할 것을 강조했지만, 결국 율법주의와 율법적 행위로 변질시켜 버렸다.

백성들은 누구를 믿을 수 있었겠는가? 이런 배경에서 사람들은 로마의 멍에와 거짓 교사들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갈망했던 것이다.

Picture - 역사적 기록: 예수께서는 격동의 시대에 성장하셨다 (The annals of History)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