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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법을 알면서도 하고 있지 않다면, 다시 기도를 시작하라!

능력 있는 기도의 비밀을 체험하라!

제자들이 주께 “주여, 기도를 가르쳐주소서!”라고 말했을 때보다 더 중요한 간청을 한 적도 없고, 또 주님이 이때보다 더 친절하게 답변하신 적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렇게 주께 간청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분명하고도 광범위한 주님의 대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최초의 제자들의 경우가 어땠든지, 주님의 자녀들이 부르기도 전에 주님이 대답하신다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명백히 해당되는 진리이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관해 많은 논의를 한 뒤에 기도의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것은 전혀 유익하지 않을 뿐더러 매우 위험하다. 우리는 기도의 실천과 관련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함으로써 크나큰 도움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의 실천’이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모든 면에서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확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 온갖 풍성한 것들이 있지만, 그것들과 더불어 심각한 결핍이 광범위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부요함을 의식하는 순간 교회의 가난함을 느끼게 되며, 교회가 가진 것을 기뻐하는 순간 교회에 없는 것을 슬퍼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는 무엇이 부족한가?

우리는 교회의 모든 곳에서 ‘능력과 무능력’이라는 이 두 가지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뽕나무 꼭대기에서 행군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하나님의 맹렬한 바람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으며(삼하 5:24 참조), 불과 얼마 전에 웨일즈의 산악 지방에서 떨기나무가 불에 타며 부흥의 불길이 솟구치는 것을 보고서도 이 나라에서는 목격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무관심한 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회심(回心)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으며, 선교 정신이 흐려지는 것에 가슴 아파하고 있다.

그러면 대체 지금의 교회가 무엇을 결(缺)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시대의 교회에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이, 교회가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를 체험으로 실현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이처럼 교회가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를 체험으로 현실화할 때, 교회는 삶과 기도의 상호작용 속에서 능력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가 우리 삶의 일상적 행위가 되는 경우가 아니면, 하나님과의 교제의 실현은 단순한 이론에 그칠 뿐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지금 나는 지나치게 트집 잡는 말이나 우리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쓰고 있다.

물론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수준 높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중재자들(기도자들)을 어디에나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종종 우리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능력의 비밀을 깨달은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의해 다른 이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된 사람들 속에서 그런 기도의 인물을 발견하곤 한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 대다수는 기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가 능력 있는 기도의 비밀을 알아야 하며, 이론으로 알 뿐 아니라 실천으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주님의 이 비밀에 들어가게 하소서!

이런 필요성을 고려할 때, 오늘 우리가 누가복음 11장 1-13절에서 제자들이 주께 간청한 것과 똑같은 간청을 드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제자들이 주께 간청했던 것을 신중히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요즈음 우리가 종종 드리는 간청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 사실 우리는 제자들이 했던 간청에 다른 말을 붙임으로써 그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그들은 “주여,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옵소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여, 기도를 … 가르쳐주옵소서!”(눅 11:1)라고 말했다.

오늘날 실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법’을 알고 있지만, 전혀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옵소서!”라는 요청은 단지 이론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기도를 가르쳐주옵소서!”라는 간청은 훨씬 더 풍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이론과 실천을 포괄하는 말이다.

제자들이 어떤 환경에서 주께 이렇게 간청했는지 주목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주옵소서”(눅 11:1).

이 말씀을 읽어보면,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의 간청이 주님의 기도하는 모습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주목할 만한, 매우 두드러진 기도의 인물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고 기도하시는 음성을 자주 들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물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기도한 적도 없었고 또 기도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과 똑같은 말을 자신의 기도에 사용한 적도 없었지만, 제자들이 보기에 기도는 그분께 실로 중요한 것이었다.

사실 제자들은 “우리도 주님의 이 비밀에 들어가게 하소서!”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을 통해 나타난 기도의 가치에 대한 제자들의 확신에서 솟아난 간청이었다.


제자들의 간청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成肉身), 온전한 삶, 속죄(贖罪)의 사역, 부활,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총체적인 사실을 통하여 이런 예비 단계의 기도, 즉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제자들과 우리의 간청에 대답하신다.

우리가 제자들의 자리를 직계로 계승한다는 점과, 그들의 간청이 우리의 간청이라는 점과, 그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대답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대답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 옛날 제자들이 처한 환경과 현재 우리가 처한 환경이 서로 다를 수 있고, 예수님의 지상(地上) 사역 초기의 특수한 메시지와 연관된 문제들과 오늘날 우리가 맡은 사명과 관련된 문제들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감안한다 해도,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본질적인 가르침이 처음에 그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위해 의도된 것이라는 점은 여전히 진리로 남는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라고 기도하셨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포근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주께서 나를 생각하고 계셨으며 제사장으로서의 중보에 나를 포함하셨다는 사실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날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으며, 그 모든 가르침을 통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용 발췌 = 기도바이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