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내 마음의 한 구석으로 밀쳐놓을 때가 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점점 더 희미해져간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당황할 필요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나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느낌에 주목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이 너무나 멀어 보이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 내게만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신약시대부터 지금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런 경험은 결코 새로운 게 아니다.
둘째, 나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쉬운 곳에 나를 둘 수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곳에서는 하품만 나올 뿐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계속 교회에 출석하고 성경도 읽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적어도 하루 한 시간씩 따로 떼어놓지 않은 채 일주일의 168시간을 미친 듯이 뛰어다닌다면,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생생하게 느끼는 사람들과 전혀 함께하지 않는다면, 내가 침묵을 위한 자리를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다가오도록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는 한 주 한 주 지날수록 조금씩 메말라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인식에 불을 지피기 위해, 내게는 올바른 책을 읽고, 적절한 음악을 들으며, 다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과 같은 영적 자극이 필요하다.
셋째, 나는 위대한 사람들과 자연에서 배울 수 있다.
나는 다른 것은 거의 하지 않은 채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혼자 숲속을 걷곤 한다. 그러면서 쌀먹이새의 노래를 들으며, 클로버의 냄새를 맡으며, 기온이 2도 내려간 것을 느끼며, 인디언페인트브러쉬 꽃이 새롭게 핀 것을 본다.
위대한 영적 거장들의 글을 읽는 것도 이와 같다.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길에 주의를 집중했으며 내가 놓쳤던 것들을 지적해줄 수 있다.
넷째, 나는 인내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가 생생하지 않은 길고 험한 인생길을 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재(不在) 가운데서도 말씀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단지 뜨거움과 황홀함과 위로와 기쁨 가운데서만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슬픔과 의심과 근심 가운데도 계신다. 나는 그분의 신호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섯째, 나는 신호가 올 때 반응할 수 있다.
나는 불신앙을 잠시 접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도록 그분의 부재에 대한 느낌을 잠시 접어야 한다. 작고 사소한 모든 “예”(yes)는, 내가 거부하지 않는다면, 큰 “예”(Yes)가 될 수 있다. 마침내, 확신은 점점 더 커진다.
여섯째, 나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나를 열 수 있다.
나는 혼자보다는 다른 그리스도들과 함께 있을 때 이것을 가장 잘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사막이나 산이나 자신의 방에 들어간다. 내가 어떻게 하든, 내게는 의식(儀式)이 필요하다. 굳이 형식을 갖춘 예전(禮典)일 필요는 없으며 기초가 되는 틀이면 된다. 나는 일단 효과가 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으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어두운 밤이 캄캄하든 희미한 잿빛이든 간에, 우리는 침묵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는 사람들에게서 배우며, 그분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곳에 자신을 두어야 한다.
내용 발췌 = 기독교교양 : 마틴 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