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FAQ
나의 '종교생활' 이야기

[나의 '종교생활' 이야기 #7]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가는 감각이 깊어지는 것과 같다

우리 목사님은 OOO이 부족해
우리 전도사님은 OOO이 부족해

‘우리 목사님은 영력이 부족해. 기도를 좀 더 하셔야 해.’ 하루에 기도를 3~4시간씩 하시는 권사님들끼리 자주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실제 기도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들이 볼 때 ‘영빨’있는 모습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목사면 자고로 신령하고 영험한 기운이 느껴져서 막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 같아야 한다. 목소리도 개구리 소리를 내야, 기도 좀 하는 목사가 되는 것이다.

영빨 있는 모습을 안 보이면 교인들에게 무시당한다. 알고 보면 성격이 온화하고 수용적이며 교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목회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우리 전도사님은 말씀이 너무 부족해. 성경공부 좀 더 해야 하겠는데?’ 교회에서 오랫동안 제자훈련을 받거나 성경 꽤나 공부했다는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다.

알고 보면 실제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들이 아는 성경구절 딱딱 대가면서 본인들이 배운 레퍼토리를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충성 봉사하며 오랫동안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쓰임 받았다는 사람, 일반 목회자는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책을 읽고 경지에 올라서 자기 나름대로 가르친다는 사람 등,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는 주로 다른 사람을 깔아 내리는 말들이 튀어나온다.

가끔 유튜브 동영상으로 올라와 있는 많은 설교자들에게도 이런 현상이 다분히 나타난다. 자신들의 일방적인 경험을 가지고 다른 목회자들을 싸잡아 깔아 내린다.

자기는 기도를 엄청나게 많이 해서 교회가 이렇게 영적이고 풍성한데 다른 목사들이 기도하지 않아서 한국 교회가 이 지경이 됐단다. 거기에 ‘아멘’ 폭풍을 쏟아내는 성도들이란…

또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다른 견해나 현상들에 대해 아주 편협한 방식으로 정죄를 하거나 극단적인 말들을 쏟아내는 경우도 많다. 결국 ‘내가 복음’이다.

이런 유형은 간단하다.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타인을 깔아 내림으로써 자신의 대단함을 증명해 보이는 것. 아주 비인격적인 방식이다.

얼마 전에 한 타임라인에서 한 목사가 ‘목회자 이중직’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건 다 제대로 된 복음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없어서라고 ‘나처럼 해봐요. 요렇게!’하고 있었다.

참 개탄스럽다. 본인이 하고 있는 말이 무슨 말인지, 다른 이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가는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와 자기 신앙의 만족도가 높을수록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상당히 상실되는 이러한 현상은 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날까.

안타깝지만 나는 위와 같은 현상들을 몸빵(?)으로 겪어왔다.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고 싶지만,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고등학생 시절은, 내 생애를 통틀어 가장 많이 기도했던 때다. 체험도 많고, 그 당시 내게 부어지는 은혜가 폭포수와 같아서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항상 주변 친구들과 동생들을 신앙적으로 직면시키는데 선수였다. 기도의 공력을 많이 쌓을수록 왜 이리 남들이 안타깝게 보일까. 급기야 나는 수련회에 가서 일을 냈다.

기도 시간에 아이들 한명 한명을 붙들고 기도하는 게 부족했는지 결국 전도사님의 등에 손을 얹고 눈물로 기도하는 상황을 선보인 것이다.

뭔가 전도사님에게 은혜를 끼치고 싶은 느낌적인 느낌 같은거.. 미쳤지. 으아아...지금 생각하면 심장이 쫄린다. 손발이 오그라든다. 이 분은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정말 죄송할 따름이다.

비슷한 경험이 또 있다. 한 교회에서 엄청난 훈련을 받고 와꾸가 제대로 짜여 있던 시절, 교회를 찾아온 연배 많으신 전도사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거의 2시간을 혼자 떠들어 댔던 것 같다. 그 분 이야기는 거의 듣지도 않고.

나 혼자 신론, 교회론, 목사님 자랑, 교회 자랑 등 한참 동안을 열변을 토하고 나니 그분은 무슨 말씀을 꺼내시려다가 기가 찼는지 웃으시며 별 말씀 없이 돌아가셨다. 아마 속으로 ‘뭐 이딴 놈이 다 있어?’ 하셨을 것이다.

말씀과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신앙적 무기이고 은혜의 방편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기본기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알며 그분을 바라보고 감화되어 간다.

한마디로 말해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책 신앙감정론에서 진정으로 은혜로운 거룩한 신앙 감정을 뚜렷이 구별해 주는 표지 6번째로 참된 겸손을 꼽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복음적인 겸손은 그리스도인 자신이 전적인 무능함, 혐오할만함
그리고 추악함과 같은 심령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감각이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가는 감각이 깊어지는 것과 같다.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구제불능의 죄인인지, 그러므로 나에게 베풀어진 이 구원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은혜인지를 더 깊이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대함에 있어 존중과 배려, 겸양의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접했던 방식은 좀 많이 빗나가 있는 것 같다. 신앙을 마치 게임 레벨업을 하거나 운동능력을 향상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단계별로 갑옷이나 무기를 획득하고 초필살기나 마법을 쓸 수 있는 영웅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병리적 현상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이유가 뭘까. 추측하건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거나 심지어는 예수님을 안 믿기 때문일 수도 있다.

종교라는 왜곡된 프리즘으로 인해 참된 하나님을 바라보거나 참된 믿음을 견지하지 못하도록 진리의 빛이 굴절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안타까운 것은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기도가 서로를 비방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도파’는 ‘말씀파’를 정죄하고, 교조주의는 은사주의나 신비주의를 비방한다. 기도파는 말씀파가 기도를 안하니까 성령의 역사가 안 나타난다고 지적하며, 교조주의는 은사주의나 신비주의의의 교리적 빈약성을 지적하면서도 기도에는 열심을 내지 않는다.

에드워즈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점차로 믿음은 헛된 말다툼으로 타락하고... 양쪽을 바른 길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게 하여 서로가 극단으로 크게 치우치게 하며, 그들이 가장 잘 끌리는 방향이나 가장 쉽게 감동되고 동요되는 방향을 따라 좌우로 치우치게 만들어 중간에 있는 올바른 길이 거의 보이지 않도록 한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신앙의 ‘자기증명’에 빠져 올바른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말씀 안에 기도가 있고, 기도 안에 말씀이 있다.

바른 교리는 기도의 내용을 바꾸어 놓고, 바른 기도는 교리를 경험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바른 교리와 바른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한 사람을 낳는다.

# 솔직히, 나 괴물이었다. 손!??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