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FAQ
나의 '종교생활' 이야기

[나의 ‘종교생활’ 이야기 #4] ‘신앙적 모범이라는 석고상’대로 빚어지려고 노력했어요

국딩때(저는 초딩이 아닙니다ㅠ), 미술 시간이었습니다. 찰흙으로 얼굴모형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미술을 좋아하고 항상 잘한다고 칭찬을 들었던 터라 자신이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보았던 석고상도 기억이 나서 멋지게 윤곽을 잡아 완성하였습니다.

다음 날, 교실 복도 앞에 죽 늘어놓은 얼굴 모형에는 점수가 붙어 있었습니다. 참 잔인합니다(ㅋㅋ) 바로 평가가 들어갑니다. 10점이 만점인데 저는 몇 점을 기대했을까요? 우쭐하는 마음으로 모여 있는 아이들을 비집고 저의 만점 ‘작품’ 세계를 감상하려는 순간, 제 점수는요.

5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이게 뭐냐’고 놀리던 제 짝꿍은 몇 점이었을까요. 8점이지 뭡니까. 아니 기본적으로 교내 미술대회 및 전국의 국딩들이 모여 미술 영재의 우열을 가르는 대회에서도 대상의 영예에 빛나는 저에게 5점이라니요. 망연자실이었습니다.

주변 친구들의 점수는 대체로 7점, 8점, 어떤 친구는 만점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점수를 짜게 준 것이 절대 아니었던 것입니다. 처참한 점수. 얼굴이 아닌 ‘감자 두덩이’를 만든 3점짜리 친구보다 2점 높은, 뒤에서 두 번째 점수였습니다. 소심한 저는 요즘 대학생들이 학점 확인 기간을 가지고 교수님께 찾아가 "왜 제가 F인가요?"를 따지듯, 따지지 못했습니다. 그저 풀이 죽어 있었지요.

그런데 ‘참 교사’이신 담임께서 그런 저의 마음을 아셨는지 따로 부르셨습니다. 손에 5점짜리 그 작품을 들고 오라고 하시더군요. 선생님이 야속한 저는 입을 내밀고 땅을 보고 있습니다.

“성균아, 점수가 5점이라서 이렇게 풀이 죽어 있는 거야?”
“(뭘 당연한 걸 물으세요) 아, 아니요. 그런 거 아닌데요.”

선생님은 가만히 제 손에 들린 ‘작품’을 가져가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균이가 만든 얼굴은 정말 석고상처럼 멋진 윤곽을 가졌구나. 그런데 선생님이 보기엔 별로 ‘성균이의 얼굴’이 아닌 것 같은데? 물론 아주 잘 만들었지만 선생님은 많이 아쉬웠단다. 성균이의 반짝이는 눈도, 눈썹도, 웃는 입도 없어서 말이야.”

'아차!' 싶었습니다. 지난 미술 시간 찰흙 만들기의 주제는 ‘나의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저의 미술  실력에 심취해서 ‘나의 얼굴’이 아니라, 어디선가 보았던 수준 높은 그 석고상을 흉내내고 있었던 거지요. 만들기 실력과는 별개로 다양하게 자기 얼굴을 표현하려고 애를 쓴 아이들의 점수는 만점에 가까웠습니다.

한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품어지면
전부 판박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오해

인생을 살면서 저는 이런 실수를 자주 반복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는 더 그랬던 것 같네요. 누군가의 기대와 사회적 요구, ‘신앙적 모범이라는 석고상’대로 빚어지려고 노력했지요. 그런데 주님은 자꾸만 제가 본 그 모양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뜻밖의 여정을 허락하시곤 했습니다.

진정한 물음입니다. 나는 어떻게 생겼느냐는 겁니다. 선생님이 제게 주신 5점의 의미는 아마도 ‘나의 얼굴’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얼마나 고민했는가에 대한 평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5점은 합당한 점수지요.

물론 하나님께서 한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방식이 너무나도 다양하기에 사실,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성경을 붙들고, 기도로 매달리며 내게 주어진 이 생을 살아내는 몸부림은 그 자체로 귀합니다. 어떤 짜인 틀과 모범 답안에 가둬지지 않는 우리네 인생을 그저 주님께 의탁하는 것이 전부인 것 같고요.

분명 성경이 요구하는 ‘상’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어떤 행위의 형태로 규정된다기 보다 ‘존재’와 ‘가치’로 표현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한 것 아닐까요. 그리스도를 믿고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떤 종교적 형태의 비슷하고 획일적인 사람으로 빚어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규정짓고 있던 석고상,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깨뜨리는 것이므로, 자기에게 벗어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뜻과 생각이 우리의 마음으로 녹아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의 착각은 한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품어지면 전부 판박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표현되는 진정한 ‘존재’와 ‘가치’를 지닌 사람이 된다는 것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진짜 얼굴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C.S 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그분께 자신을 드리면 드릴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다워집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깊어진다는 의미는 더욱 자기다워지는 것이며, 무채색의 흑백텔레비전이 총천연색의 풀컬러텔레비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생명이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는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우리의 인생을 빚어가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어떤 ‘상’이나 옳다고 여기는 ‘모범 답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나를 드리고, 우리의 생을 드리는 겁니다. 얼마나 자유로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이라는 단면만 보며 발을 구르는 우리의 시야가 인생 전체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넓어지는 것이니까요.

남을 향한 평가에 능한 우리 신앙도 한번 점검해봅니다. 섣불리 답을 제시하거나, 교정과 교열, 검열까지 거치는 우리의 순결한 신앙 말입니다. 왜 그런지 공부를 많이 하고, 뭔가 자신의 깊은 주관을 가진 사람일수록 답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지요. 한 사람의 생을 단편적으로 ‘오독’하거나 자기 나름대로 비판하는 것은 그래서 좀 떨떠름한 것 같아요.

성경의 인물들과 교회사 가운데 믿음의 선배들을 접할 때, 우리는 보통 한두 줄의 매우 스탠다드한 평을 접할 뿐입니다. 그들이 어떤 애환과 삶으로 인생을 살아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퍼즐 맞추기 하셨는지는 사실 잘 모르면서요. 그래서인지 목회 사역을 하다가 주님 앞에서 가끔은 민망하고 죄송할 때가 많습니다.

한 인생을 빚어 가셔서 저마다의 ‘자기다움’을 기다리시는 주님을 자꾸 잊습니다. 한 사람을 조금도 인내하지 못하는 죄인이라서요. 그때마다 생의 각기 다른 모습으로 영광스러우신 당신의 얼굴을 비추어 내시는 하나님 앞에 깊은 마음의 무릎을 꿇습니다. 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오늘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