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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을 품으면 믿음이 연약한 걸까요?

모태 신앙은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니다 보니 말씀 그대로 믿는 것이 당연하고 마음에 의심이 들어오면 그건 나의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요즘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워온 지식으로 말씀을 궁금해하면 그냥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내 안의 의심으로 인해 나를 정죄하지 않으며 정직한 의심을 하나님께 아이들이 가지고 나아갈수 있도록 기도하는 부모가 되어야 겠습니다.

나는 목사로서, 사람들이 직면하는 중요한 도전 중 하나를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언급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 도전은 바로 “의심”이다.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이따금 영적 의심과 싸우지만 그 주제를 다른 신자들과 얘기하는 게 편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의심은 거의 약함이나 믿음 없음,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 부족의 표시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 있게 말한다.

“성경이 그렇게 말합니다. 저는 성경을 믿으니 그것으로 해결된 거잖아요!”
내가 아는 한 사람은 늘 이렇게 말하곤 한다.
“지금 이 순간, 내 믿음이 아주 큰 소리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의심의 소리는 전혀 안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하는 경험이 아니다. 내 경험도 아니다.
내가 알기로, 참되고 바위처럼 견고한 믿음의 사람이 한 명이라면 자연적으로 회의적인 사람이 열 명이다. 이들은 대부분 생각이 깊고 지적이며 분석적인 사람들로서, 자기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길 원한다. 단지 그들은 몇몇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는 것뿐이다. 솔직한 회의론은 나쁜 게 아니다.

우리 대부분은 어렸을 때는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은 무엇이든 그대로 믿다가 경험이 쌓이고 그들의 지혜를 테스트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의문을 갖는다.

어린 내가 평소처럼 지루해하며 교회에 앉아있던 때가 기억난다.
그 주일에 나는 헌금 봉투에 슈퍼맨을 다 그렸다. 고정 찬송 중 마지막 찬송의 4절이 막 끝났다(우리는 늘 1, 2, 4절을 불렀다. 왜 3절은 늘 건너뛰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목사님이 가운 차림으로 미소를 지으며 설교단으로 걸어 나와 그날의 성경 본문에 관한 설교를 시작했다.

그때 무슨 이유인지 나는 갑자기 뭔가 옳지 않아 보였다. 그 날 아침만 해도 하나님이 실재라고 확신하며 교회에 들어섰다. 그런데 설교를 듣는 동안, 머릿속에 온갖 질문이 밀려왔다.

‘하나님 어쩌고 하는 이 모든 게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가 그저 하나님이 있다고 상상하는 거라면? 하나님이 있지만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하는 그 하나님이 아니라면?
여기 모인 대부분의 미국인이 그렇게 믿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뿐이라면 어떻게 하지?
예전에는 산타클로스와 부활절 토끼와 삼신할머니를 믿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보라고….’

내 말을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내가 한순간은 그리스도인이었다가 그 다음 순간은 무신론자였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싶었다. 단지 믿기가 더 어려워졌을 뿐이었다. 무엇이든 그대로 받아들이던 어린시절의 댐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호기심과 인지 발달이 들어서면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나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여덟,아홉 살이라면 누구라도 할 법한 생각들이었다. 나는 하나님과 흥정하려 했다.
‘여기요, 내가 어떻게 상황이 되어가는지 주목하고 있다고요!’
나는 주일학교 때부터 모세에게 불타는 떨기나무가 있었고, 다윗이 사자며 곰과 싸울 때나 골리앗이라는 거인과 싸울 때 도움을 받았다는 걸 배워 알았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에 던져졌는데도 털끝 하나 그을지 않았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내게 조그마한 뭔가를 주셔서 믿도록 도우실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나는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위대한 성경의 영웅들이 아니었기에 뭔가 엄청난 걸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태양을 멈추게 하시거나, 동물들을 한 쌍씩 내 방에 보내어 그분이 실재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 방 벽에 걸린 그림을 조금 비뚤게 돌려놓았다. 그런 다음에 전능하신 우주의 하나님과 재빨리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실제로 계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벽에 걸린 그림을 살짝 기울여 놨어요. 내가 잠든 사이 똑바로 해주실 수 있죠? 내가 일어났을 때 그림이 똑바로 되어 있으면, 하나님이 진짜 계신다고 알고 평생 섬길게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는 아주 간단하고 쉬운 요구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음 날, 그림은 여전히 비뚤게 걸려 있었다. 나는 참담했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크게 실망했다. 내 요구가 공정하고 지극히 쉬운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주무시지 않으신다. 설령 주무시는 중에라도 내 요구를 들어주시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은 여전히 똑바로 걸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했을 법한 행동을 했다. 내 의심을 묻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게 가만히 묻혀 있지 않는 게 문제였다. 나는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의심, 또는 신뢰의 부재는 온갖 형태와 크기로 온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계시지만 우리의 일상에는 그다지 관여하지 않으실 거라고 믿는다.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으며, 그분이 정말 선하시다면 세상에 많은 악과 질병과 고통을 허락하실 리 없다고 주장한다. 또는 자신들이 기도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주 또는 전혀 기도하지 않는다.

어떤 형태든 의심을 품으면 믿음이 강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시각에서 보라고 말하고 싶다. 정직한 의심을 통과하지 않으면 강한 믿음도 갖지 못할 것이다. 신뢰하기로 결정하려면 자신이 의심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더 나은 선택>크레이그 그로쉘 p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