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과 비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이 반드시 대립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면, 비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핵전쟁이 부도덕하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
인종차별이나 환경오염이 부도덕하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 이들 모두 낙태나 정직한 비즈니스와 개인적인 문제와 같은 구체적인 문제나 그밖의 많은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 동의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공통된 기반이 많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양심이 있으며, 바울이 로마서 2장 14,15절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의식이 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그러나 '세상적인'(Worldly)이라는 단어는 "너희는 이 세대(world)를 본받지 말고"라는 명령에서처럼(롬 12:2) 기독교에 대한 반대를 암시한다. 요한은 이것을 훨씬 더 강하게 표현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세상은 기독교에 매우 적대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기독교적인'이란 말을 일반적인 의미의 '세상적인'이란 말과 대조시키는 게 아니라 특정한 장소와 문화의 '세속성'(worldliness)과 대조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치관은 바뀌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가장 심한 마찰 가운데 하나는 개인의 행복의 궁극적 가치와 헌신의 가치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찰이다. 세상은 내 자신을, 다시 말해 즐거움과 행복과 평안과 사랑에 대한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극대화할 최고의 권리가 내게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가치관은 행복에 대한 나의 권리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나의 공동체에, 나의 교회에 헌신해야 하는 나의 의무라고 말한다.
내가 언제 성경을 따르고 있고 언제 세상이 강조하는 바를 따르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한 가지 방법은 성경을 계속 읽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삶의 문제들이 있다. 윤리학은 당신이 마음을 정하고 어떤 종류의 결정이 성경에 가장 일치하는지를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을 따르는 것과 윤리를 따르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훌륭한 윤리 교과서를 드는 게 유익할 때가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모호한 문제들에 대해 윤리학적 토론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것에 토대를 두기 위해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또한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무엇이 문제인지 알기 위해 윤리학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모든 윤리학자들이 세상적인 것은 아니며 하나님은 이들의 지혜를 통해 그분의 뜻을 전하실 수 있다.
궁극적인 해답은 성경을 계속 읽고,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질문을 하는 것이다. 기꺼이 배우려는 자세를 취하라.
글 = 루이스 스머즈
용서의 문제를 실제적으로 연구한 전 풀러신학교 기독교 윤리학 교수, 대표저서 <용서의 미학>, <용서의 기술>
내용 발췌 = 기독교교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