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자료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난 인생에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결국 주님만 바라봅니다

영적 생활의 중심은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그분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도록 돕는 강산 목사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이 가을에 참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듭니다.

혹시 오늘 우리는 삶에서 원하지 않은 소나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소나기가 나의 삶을 어둡고 힘들고 차갑게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소나기는 우리가 지금까지 피상적으로 알았던 무언가를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고 강 목사는 자신의 일상 이야기로 편안하게 말을 건넵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난 우리의 인생에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그 비를 통해 그동안 만나지 못한 것들을 바르고 깊고 의미 있게 만날 수 있다고 말이죠(아래 찬양과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프랭크 루박의 기도일기처럼, 소소하게 써내려간 그의 에세이 같은 글에서 더욱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샬롬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힘든 일은 무엇입니까? 대부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가장 힘든 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누구나 어려운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려움의 연속입니다. 누군가는 놀고먹기만 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막상 놀고먹는 사람들도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차피 모두 다 힘든 인생을 산다면, “무엇으로 힘든가?”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가치 있는 힘든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무가치한 힘든 일을 하고 있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왜 우리의 삶에는 생명의 역전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삶의 구원자와 주인으로 모시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여서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가진 역전의 생명이 그 중심에 없고, 실제로는 세상의 가치와 운명론에 지배를 받으며 주일에만 잠시 하나님을 믿고 일상에서 모든 일을 자기 방식대로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성경을 지식으로만 읽을 뿐이고, 그저 영화관에 가듯 예배에 참석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늘 대접만 받으려 하고, 자신이 편한 방식에 따라 선택적이고 부분적인 순종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생명의 복음, 역전의 복음을 믿으면서 그것을 누리지 못할까요? 작은 연고를 발라도 치료가 되고, 편의점 음식 하나를 먹어도 배가 부르고, 짧은 시 한 편에도 감동을 받는데, 왜 우리는 신앙을 수십 년간 흉내만 내는 걸까요?

이제 아무런 역전이 없는 자신의 심장에 손을 얹고서 목숨을 걸고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내 인생은 역전되고 있는가?”


성도들은 "목사님, 이제 제발 스마트폰으로 바꾸세요"라고 합니다. 저도 솔직히 스마트폰을 갖고 싶습니다. 그래서 참 많이 갈등하고 기도했지만 결국은 휴대폰 매장에 딱 하나 남아 있는 폴더폰을 선택했습니다.

세상의 정보와 갈등하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과 갈등하며, 페이스북과 인터넷에서 갈등하는 대신 기도와 갈등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혹시 무슨 갈등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지금 하는 갈등이 곧 당신의 미래라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요셉)는 과거를 쓸모없는 부품이나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운명의 방해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징검다리와 디딤판으로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요셉 안에 행하시고자 한 일이었으며,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따른 요셉의 순종이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은 좋은 과거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 과거를 하나님의 미래로 전환시킨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과거에 대한 해석이 변화되자 온 인류의 과거에 대한 해석이 변화된 것이다.


그분의 진리는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무엇을'만이 아니라 '어떻게'를 함께 도전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우리의 '어떻게'가 우리의 '무엇을'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떻게'가 우리의 '무엇을'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무엇을'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무엇을' 가치 있게 드러낼 '어떻게'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딱 한 걸음이었습니다." 솔직히 두 걸음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딱 한 걸음만 더 걷자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 펼쳐진 바른 길을 걸어가면서 당하는 모든 시련과 아픔은 한결같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 온전히 닮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무엇이 될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을 것이라면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곧 오십니다.

내용 발췌 = 결국 나는 무엇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