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교회 역사학적 측면에서 아주 의미 있는 해네요(✪◡✪)
종교개혁이 지금의 내 신앙생활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 할 수 없었을 수도 있죠.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러니까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요?
교회사가 왜 중요한지 한홍 목사님이 3가지 이유로 말씀하셨죠.
첫째,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겸손을 배우기 위해서다. 둘째, 우리는 균형감각을 갖기 위해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셋째,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다.
종교개혁의 새벽에 해당하는 시즌별 인물을 통해 간략하게나마 종교개혁을 살펴보려고 해요. 아래 정리한 내용은 '종교개혁 히스토리'를 요약했으니, 전체 내용을 읽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면! 갓피플몰에서 구매해서 읽어주시면 캄사하겠습니다.(❁´◡`❁)
존 위클리프 is
[caption id="attachment_43520" align="aligncenter" width="528"] 존 위클리프 , 사진 = 강신욱[/caption]
천 년이 넘도록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모든 만물과 사람을 다스리는 주권을 교황에게 위임하셨다고 가르쳐왔다.
가톨릭교회, 엄밀하게 말하면 교황만이 이 땅의 정치 지도자들이 죄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죄인을 출교시키는 권리는 중세시대 수많은 세상의 지도자들을 교회의 권위 앞에 무릎 꿇리는 아주 효과적인 무기였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이 로마 가톨릭의 주장에 반박하고 나섰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존 위클리프였다.
[caption id="attachment_43521" align="aligncenter" width="1200"] 가난한 사제들에게 성경을 나눠주는 위클리프 Willian Frederick Yeames[/caption]
- 교회의 중재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위클리프는 세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주권은 가톨릭교회나 교황의 중재에 달린 게 아니라고 했다.
"그 힘을 행사하는 자가 과연 은혜 가운데 있는가" 즉, "심각한 죄를 짓지 않은 상태에 있는가"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은 성직자든 평신도든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 그러므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리더십의 권위는 거룩한 인품에서 온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했던 중세교회의 사제나 성례 제도는 필수적인 게 아니다."
그의 파격적인 주장은 단숨에 위클리프를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는 세력의 선두주자로 부상시켰다.
- 교황들도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한다
위클리프 시대는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과 로마 두 개로 나뉘어 신음하던 시점이다.
진정한 성경적 교황이라면 가난하고 겸손하게 살면서, 교회를 조용히 섬기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크리스천의 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교황청은 그저 사람들을 정치적인 술수로 조종하는 또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전락했을 뿐이라고 위클리프는 개탄했다.
- 그 어떤 성례보다 중요한 것은 설교다
위클리프는 지상의 교회를 택함을 받은 자들, '반드시 구원받을 사람들'로 정의했다. 교황이라고 해서, 누가 구원받은 자인지 아닌지를 보장할 힘이 없다.
위클리프는 "그 어떤 성례보다 중요한 것은 설교다"라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들과 종교 시스템과 행위들은 오직 말씀에 의해 평가돼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엄청난 주장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천 년이 넘도록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권위를 말씀의 권위 위에 놓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교회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인정해주기 때문이다"라고 위클리프는 말했던 것이다.
- 모든 사람이 성경을 탐구할 수 있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의 학자들을 모아서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 성경이 훗날 최초의 영어 완역본 성경인 '위클리프 성경'이 된다. 존 위클리프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 배급하는 데 거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얀 후스 is
얀 후스는 현재의 체코에 해당하는 보헤미아에서 종교개혁의 서막을 열었던 개혁가다. 그는 체코의 프라하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훗날 같은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젊은 시절 위클리프의 글에 매료된 그는 "교회는 교황이 아닌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는 택자들의 모임"이라는 위클리프의 주장을 가슴에 깊이 새겼다.
[caption id="attachment_43519" align="aligncenter" width="497"] 콘스탄츠 공의회에 선 얀 후스[/caption]
당시 교황은 성당과 수도원에서만 설교할 수 있도록 제한했으나 후스는 이 명령을 어기고 캠퍼스와 강의실에서도 설교했다. 이로 인해 교황청과의 갈등은 더 커졌다.
1415년 종교재판을 열어서 후스를 화형에 처했다(이때 불을 지피는 데 위클리프 성경책을 사용했다고 한다). 화형대에 선 후스의 마지막 유언은 실로 의미심장했다.
"이제 백 년 안에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세우실 텐데, 그가 가져올 종교개혁은 결코 막지 못할 것이다."
후스가 순교당하고 거의 백년 후인 1517년,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리는 95가지 논제를 독일의 비텐베르크대학 성당 정문에 못박았다. 후스의 예언이 정확히 이뤄진 것이다.
종교개혁의 새벽
종교개혁의 새벽, 그 핵심은 말씀의 회복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타락했던 핵심 원인 중 하나는 성도들이 직접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황청은 진정한 교리는 교황과 사제들에 의해 가르쳐지고 방어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니 교황청이 아무리 무리한 요구를 해도 성도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성도 각자가 말씀을 직접 읽고 검증할 수 없으니까 로마 교황청이 잘못된 길을 가도 그냥 묵과하고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caption id="attachment_43522" align="aligncenter" width="2003"] 존 위클리프, 사진 = 규장[/caption]
그래서 위클리와 얀 후스는 성도들이 자기 나라의 언어로 성경을 읽게 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보았다.
개신교의 종교개혁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언어로 성겨말씀을 읽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우리 교회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새로워져야 한다. 나 자신부터 말씀 앞에 회개하며 바로 서야 한다. 그러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회개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교회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
내용 발췌 = 한홍 목사의 종교개혁 히스토리
사진 : 강신욱, 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