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길의 제자도

크리스천이라면 격공!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섬겼더니:) - 김길의 제자도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수 17:14,15)


1. 원하는 것 몇 가지

내가 원하는 사람과 일에 대한 내용이 중요한 시험이자 훈련, 극복해야 할 과정이다. 우리는 원하는 사람들과 조직을 이루어 의미 있고, 중요한 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별다른 문제가 될 것 없는 위와 같은 욕구가 우리 교회 안에서는 늘 문제가 되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 우리는 부름 받았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일을 크게 만들어서 무언가 의미 있게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 예수님께서도 의미 있는 일인지, 그 일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셨다면, 나는 내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름 받은 사람이 예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일을 말하기 전에, 나의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믿고 관계를 맺으며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다 예수님의 일이 될 것이다. 그 일을 통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명백히 신앙적인 일이지만, 그 일을 나를 위해 한다면 참 위험한 일이 된다.

예수님의 일을 예수님을 위해 하려고 한다면, 내가 원하는 사람을 찾아서는 안 된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찾고, 원하지 않는 사람과 있는 것을 너무 고통스러워 한다면 말과 행동이 다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내 말을 알아먹고, 내편이 되어주며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 안에서는 예수님이 주인되실 수 없다.

서로 마음에 맞는 관계만큼 예수님이 없는 관계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와 관계의 주인이시라면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그분의 뜻을 받고 있을 것이다. 결코 쉽게 인간적으로 하나되기 어렵다. 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분별하시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욕심이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문제가 될 가망이 높다.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오래 관계를 지속하긴 어려울 것이다. 욕심으로 하나되기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말이다.

서로 예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성령께서 근심하시는 것을 깊이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면 모든 관계는 사람 그 자체로 크게 의미가 없다. 예수님의 뜻이 없는 관계가 아무리 튼튼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하나될 가망이 거의 없이 때문이다. 사소한 것 하나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쉽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관계야말로 우리를 보호해준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서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과 무리없이 지내면서 서로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다면 훈련이 거의 마무리된 사람이 아닐까 싶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찾는 자체가 공동체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후손들인 에브라임, 므낫세 지파처럼 모여서 권력을 이룬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정치적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2. 분열이 아닌 즐거운 부르심

내 마음에 맞는, 조금 더 정확히 말해 나의 이익에 맞는 사람들과 조직을 이루면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그것이 분열이다. 에브라임 지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거나 전쟁에서 승리해 참여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것에 더 마음이 있었다.

에브라임 지파처럼 노골적으로 우리가 마음을 쓰지 않아도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일인지 알 필요는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이루겠다는 믿음 안에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잘 다루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정치적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교회에서 진행했던 ‘떼루아 전도’는 무척 즐거웠다. 나는 도시에서 기도할 때마다 즐겁다. 이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평강과 기쁨을 주시는 것이다. 나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이 될 때에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나의 일이 되면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만다.

목사로서 명신교회의 일을 나의 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심스럽게 나의 목회가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대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부르심을 이루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받아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무슨 일만 맡으면 아주 작은 일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되면 본인뿐 아니라 그 일에 참여한 모두가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일에 멀리 내다보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적인 지혜일 순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무 것도 얻을 게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즐거움을 회복하면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조금이나마 잘 견디며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임이 요구되는 가정이나 책임과 결과를 요구받는 직장에서 우리는 때로 시달리며 힘들다. 그래서 내 마음에 맞거나 책임이 없는 곳을 찾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책임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내 욕심을 이루지 않고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할 때, 우리는 담대하게 예수님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예수님의 도움을 받을 때, 어려워도 침착함을 잃지 않게 된다.

부르심 안에서 내 욕심을 이룰 순 없지만 주님의 권능을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의 일은 주님이 주시는 권능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도움을 많이 받을 때 나의 것이 아닌 예수님의 것임을 알고 순종하게 된다. 내 일이 아니라는 의미는 내 것이 없다는 말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셔서 도와주시고,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그분의 권능과 즐거움에 참여하는 기쁨을 알게 된다는 의미다.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섬겼더니 은혜로 받은 것이 많아지고 풍성해지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