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길의 제자도

늘 흔들리는 내 마음, 어쩔 도리가 없다고요?- 김길의 제자도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1. 내 요구만 하고 있지 않는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시면서 시험을 물리치신다.

예수님은 떡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을 주시는 분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시험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지 말고, 떡을 주고 떡을 먹고 살게 하라는 것이 시험의 내용이 아닌가 싶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께 말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떡을 구하고 있다면 혹 시험의 통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또 먹을 것도 주신다. 그러나 시험의 내용처럼 내 욕심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도전하고 있다면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잊어버리고 내 필요에 집중하며, 그분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 방식과 내용으로 요구하듯 하고 있다면 많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믿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신다. 그러자 사람들과 제자들은 많이 떠나갔다.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은 내 필요에 많이 걸림이 된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1,66).

우리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믿을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인 결정해야 한다. 어떤 문제에서는 그런 내 결정이 도전이자 걸림돌이 될 것이다.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게 할 것이다.

내가 원한다고 예수님의 정체성이 변하지 않는다. 변한다고 생각하면 큰 실수다. 그런데도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요구하는 것은 그분을 괴롭히는 일이다. 지금도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에 대해 떡을 주는 분으로 오해하게 하면서 떡을 요구하도록 부추긴다. 속아서는 안 된다.

내 욕심대로 안 되면 시험에 들고 죄가 나온다. 다양한 욕심의 주요한 모습은 아마도 내가 원하는 떡을 달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 떡을 주지 않는다면 나는 시험에 들겠다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다.


2. 내가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안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자기가 아는 대로 배척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고,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을 보고 알았을 뿐 아니라 놀랐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자신의 마음을 바꿀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분명하게 예수님을 보고 알았어도, 그의 지혜와 권능을 경험했어도 바꿀 의사가 없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 있는 내용이 진정한 예수님을 알고 믿는데 방해와 걸림이 된다. 잘 돌아보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항상 모든 순간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믿고 따라야 한다.


3. 흔들리는 내 정체성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말씀을 주시는 분이고, 나는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떡으로 살고, 말씀이신 예수님을 잊어버린다. 내가 어떤 떡을 구하고 있으며, 어떻게 말씀에서 벗어났으며, 지금 믿음의 정체성은 어떤 상태인지 잘 알지 못한다.

누구든지 떡이 필요하다. 그래서 순식간에 나도 모르게 정체성의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내가 아닌 모습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혼란스럽다.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내 욕심이 아니라 내 주인이신 예수님이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내 모습을 잊은 것이다.

흔들리는 내 욕심이 나인 줄 아는 것이다. 내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없는 것으로 아는 어리석음이다. 내가 나인 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할 때다. 예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의 욕심 안에서는 나를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은 진실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돈이 풍족해서 마음껏 쓰는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정체성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돈이 없으면 나는 없는 것이고, 돈이 있으면 내가 있는 것이다. 내 정체성이 돈이 된 것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내 인생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정체성에 문제가 생긴다.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면 나는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인생을 의미 없이 살게 만든다. 내 인생이 의미가 없는데, 믿음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시험과 죄에 너무 약한 삶이 된 것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4. 말씀이 세계가 될 때까지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계를 지으셨다. 예수님은 말씀이시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3절에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우리는 말씀으로 살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말씀이 눈에 보이는 세계가 될 때까지 우리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믿고 따라야 한다. 그것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삼고 속지 말고 시험을 물리쳐야 한다.

시험은 나의 욕심대로 예수님을 생각함으로써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에서 벗어나 그분을 경험할 수 없게 만든다. 진정한 인생은 말씀이 현실이 되는 세계에서 날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아직 현실이 되지 않은 세계에 대해서는 말씀을 붙들고,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말씀의 현실에 대해서 감사하며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