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는 김장독에 넣어 땅에 파묻어야 제 맛이 나듯 성경은 묵상독(默想讀)으로 읽을 때 참 맛이 난다. 물론 통독(通讀)을 병행하면 좋다.
통독은 차를 타고 산을 한 바퀴 돌면서 구경하는 방식이다. 전체 산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형세를 파악하는데 유리하지만 산을 제대로 경험하기엔 부족하다.
묵상독은 배낭을 메고 두 발로 산을 오르면서 경험하는 방식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전체 형세를 파악하는 데는 미흡하다. 그러나 산 구석구석의 진면목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두 발로 산을 오르면 수확이 많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나무의 상쾌한 숨 내음을 맡을 수 있고 정강이를 채근하는 이름 모를 풀들의 즐거운 조잘댐을 들을 수 있다.
심신의 질곡 사이에 묻어 있는 앙금까지 씻겨 내리는 듯한 시냇물의 시원함을 들이킬 수 있다. 온 몸을 두드리는 이 청량한 느낌들은 운전대에 앉아서 앞만 보고 달리는 운전자나 차 창 안의 구경꾼의 입장에선 절대 경험할 수 없는 벅찬 생동감이다. 묵상독을 하면 성경의 텍스트를 통해 이런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묵상독의 효과를 더 극대화 하는 방법은 보고 들은 바와 그 느낌을 기록하는 것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감동들이 조만간 휘발되고 소실된다.
한 달만 지나도 언젠가 주머니 속에 있었을 100원 짜리 동전과 같이 잊힌다. 머리에서부터 시작해서 머리에서 끝나는 묵상들의 결국이다.
그러나 머리에서 시작된 묵상이 손끝을 통해 글로 정리되면 묵상은 비로소 뜨겁게 가슴으로 들어오게 된다.
가슴에 들어 온 묵상은 대개 삶의 열정과 열매로 꽃핀다. 게다가 언제든 다시 펼쳐서 그 묵상의 감동에 오롯이 다가설 수 있다.
묵상의 은혜를 기록하면 그렇지 않을 때 보다 그 은혜가 배가된다. 왜 묵상을 기록해야 하는가. 153가지 이유 중에 지면 관계상 5가지 이유만 나열한다.
1. 묵상을 기록하면
은혜를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묵상을 기록하다 보면 어떤 땐 기록할 내용이 전혀 감히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펜(컴퓨터 자판)을 들고 책상에 앉아서 텍스트를 뚫어져라 바라보지만 오리무중이어서 실마리를 풀어 낼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무작정 기록을 시작하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묵상의 내용이 이루어져 가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고, 삶에 적용하는 부분에 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때론 ‘손끝이 묵상하지 않나?’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물론 손에 두뇌가 있어 스스로 묵상할 리가 없다. 손은 그저 두뇌의 지시에 따라 긴밀한 협업을 진행할 뿐이다.
그럼에도 먼저 손을 움직여 기록하면 두뇌의 묵상이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손을 통해 머릿속의 묵상이 풀어진다.
기록하면 묵상의 깊이와 넓이가 배가 된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언어가 아닌 내 언어로 정리해서 직접 마음에 품은 내용은 오롯이 내 것으로 남는다. 은혜는 기록될 때 비로소 풀어지고 모아지고 확장된다.
2. 묵상을 기록하면
은혜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쓰면 느려지고, 느리면 분명해진다. 손으로 쓰면서 우린 그렇게 알게 된다. 내가 누군지, 무엇을 원하는지." _독일 필기구 회사 라미(LAMY)의 CEO 베른하르트 뢰스너
기록하면 느리지만 대신 분명해 지고 정확해 진다. 생각 속에서 얼버무리던 것도 쓸려면 사실관계를 한번 더 확인해야 된다.
머릿속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것이 글로 기록되면서 각자 있어야 할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된다. 모호했던 개념이 구체화되고 내 언어로 풀어진다.
이 과정 가운데 모종의 지적 쾌감이 동반된다. 이를 '기록 흥분 호르몬'이라 부를 수 있겠다.(저자 주) 그래서 묵상을 기록하면 행복해 진다.
역으로 행복해 지려면 묵상을 기록하면 된다. 이 호르몬의 강한 중독성은 묵상을 기록하는 사람을 격이 다른 은혜의 차원으로 안내한다.
3. 묵상을 기록하면
은혜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언어로 기록하면 내 것이 된다. 오래 전 역사 속의 무미건조한 텍스트가 일어나서 나에게 말을 건다. 그 텍스트들과 대화하고 그 교훈을 소화해서 오늘의 나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
묵상을 기록해도 변하지 않는다면 좀 더 묵상 기록을 지속하면 된다. 묵상 기록의 수준을 염려할 필요는 없다. 진정성만 있다면 어떤 수준의 묵상 기록도 유효하다.
대단한 묵상 기록의 욕심을 버리고 묵상 기록을 지속하다 보면 어느덧 묵상의 수준이 깊고 넓어진다. 그래서 책을 써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백한다. 전문가여서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책을 써서 전문가가 되었다고 한다.
4. 묵상을 기록하면
은혜를 되새김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은 감동의 시효를 장기화 한다. 비록 머릿속에서는 그 감동의 기억이 흐려졌다 하더라도 언제든 검색을 통해 텍스트를 다시 마주하는 순간 감동의 상태를 복구할 수 있다. 그래서 계속 이전의 묵상기록들을 펼쳐 봐야 한다.
성도에게 있어 보물은 장롱 속의 패물이 아니라 은혜의 보고인 묵상 기록이다. 따라서 가끔 펼쳐 볼 수 있도록, 필요할 때 검색하여 찾아 볼 수 있도록 묵상 기록 내용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같이 언제라도 묵상을 통해 감동을 받던 그 시점으로 돌아가 그 감동들을 오롯하게 재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또한 오늘의 묵상의 기록이 분명 내일의 힘이 될 텐데 무슨 걱정이란 말인가?
5. 묵상을 기록하면
은혜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묵상 프로세스의 마지막 단계는 묵상을 나누는 것이다(Sharing).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 같은 묵상 본문을 읽고 받은 은혜를 나누면 좋다.
다른 사람의 나눔을 통해 묵상의 은혜를 다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바쁜 현대인들에게 나눔의 환경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묵상 기록을 SNS에 나누면 된다. 독자들의 댓글을 통해 새로운 각도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또한 내 묵상 글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혹 게을러 질 때라도 묵상 기록을 지속할 동기가 부여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묵상의 은혜를 불특정 다수에게 전함을 통해 예수님이 명하신 복음 전도의 명령도 실천하는 셈이 된다.
이상과 같이 묵상 기록을 지속하면 묵상의 은혜를 분명하게 붙잡아 낼 수 있다. 그렇게 말씀이신 하나님을 체험함으로 그의 은혜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든 필요할 때 그 묵상을 피드백해서 은혜를 재현할 수 있다. 또한 내 묵상 글은 나의 한계를 벗어나 나눔을 통해 확장될 수 있다.
묵상의 원천이 되는 성경 말씀은 무엇인가? 어떤 인문고전보다, 어떤 인간의 지혜보다 뛰어난 텍스트이지 않은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그의 특별한 계시이지 않은가. 말씀을 묵상독으로 읽으면서 주신 은혜를 기록하면 비밀스런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오늘부터 그 은혜를 절절히 경험해 보기 위해 묵상을 기록해 보면 어떨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