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막 4:20,21).
성장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겨자씨 한 알이 모든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를 내서 새들이 그늘에 쉬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씨앗이 이삭이 되고 충실한 곡식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작은 일이 크게 된다는 의미다. 성경은 이런 하나님의 나라 원칙이 믿음과 관계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 마 17:20
겨자씨 한 알처럼 작은 일이 의미 있고 큰 일이 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능력은 작지만 믿음으로 큰 일을 감당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일의 결과나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믿음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성장을 위한 믿음
성장이나 의미가 우선되는 것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내가 원하는 분위기나 의미가 없다고 의욕을 상실하거나 믿음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내 삶의 동기가 내가 원하는 것에 있다면, 언제나 삶은 나를 실망시킬 것이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우리 삶을 지켜줄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항상 모든 일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과 믿음의 내용에 있다. 작은 믿음,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작고 소박한 마음이다.
예수님을 향한 작은 마음이 현실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만든다. 내 마음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이 내 마음을 주장하셔서 삶의 모든 영역에 은혜와 믿음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은혜와 믿음이 없다면 삶에도 없을 것이다.
상황을 해결하기 전,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루기 전에 하나님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모든 일의 우선순위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믿음이 연약하면 상황을 제압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삶을 해결하는 기적을 경험하기 힘들다.
가끔 자신의 삶의 문제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결되는 경우를 본다. 삶의 문제가 해결된 것을 자신의 삶에 대한 정당성이나 하나님을 향한 이해를 정당화 하는 데 사용하는 것을 본다.
믿음으로 일이 해결되었다면 자신의 삶의 정당성을 먼저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는 열매가 있다.
삶의 열매와 결과는 내가 원하는 방식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해결되었을 때 정직하게 믿음이 성장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방식에 대한 확신을 가진 것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늘 우리는 내가 원하는 방식이 어떤 의미인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어 한다.
연약한 믿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두려워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보다 내 삶이 더 중요해진다.
일의 결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좋아하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는 나를 향해 기뻐하시는지 아니면 근심하시는지를 생각하고 돌아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믿음은 내 삶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내 삶의 어떠함보다 믿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
예수님을 향해 작은 신뢰도 없는데 내 삶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믿음의 세계를 어슬렁거리고 있진 않은가.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주석에서는 자연을 향해 꾸짖고 명하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고 한다.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으로서 모습이다. 맞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 4:40b)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두려움에 맞서는 믿음의 태도가 필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거나 고기가 먹고 싶거나 가나안 땅의 적을 볼 때 두려워했다. 두려움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이 주는 결과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을까 두려워서 걱정을 했고, 그런 상황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원망했으며 결국 광야에서 인생을 마감했다.
두려움은 누군가를 원망하도록 만든다. 남 탓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우리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 같지 않을 때, 누군가 이 상황을 만든 존재를 찾는다.
문제는 두려움으로 마비된 마음은 내 마음의 과정을 인격적으로 깨닫게 해주지 못하고, 두려움이 마음과 삶을 주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두려움이 오면 우리 마음은 벌써 저 멀리 도망치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도와주지 않거나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제자들도 그렇게 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b).
믿음으로 풀어가는 두려움
나 자신의 두려움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두려움에 붙잡혔다는 가장 정확한 증거는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의 내용을 알았다면 두려움을 향해 믿음으로 맞서는 마음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들에게 맞서기 전에 자신의 두려움을 맞서야 한다.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자신의 두려움을 믿음으로 보기 시작할 때 두려움은 작아진다. 두려움 때문에 도망가거나 두려움에 붙잡힌 반응을 보이거나 하지 않고, 두려움 그 자체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다.
문제가 파악되었다면 두려움의 내용과 그것이 가져다준 결과를 분별할 수 있다. 예상하는 결과들에 대한 두려움도 작아진다. 그러면 다가오는 상황들을 더욱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 있다. 너무 예민하다는 것은 두려움을 아직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다. 두려움이 다스려진다면 맞닥뜨린 상황을 향해서도 우리는 믿음으로 다스리겠다는 태도를 가질 수 있다.
반드시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고, 다스려야만 한다는 태도로 도망가지 않게 될 것이다.
두려움으로 마음이 도망가면 원망이 생기고, 희생양을 찾고, 복잡한 반응을 하게 된다. 하지만 믿음이 생기면 도망가지 않고 맞서서 다스릴 수 있다. 그럼에도 갑작스러운 상황이 오면 당황할 수 있지만 다시 믿음을 세워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