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은 ‘가만히 있음’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그들에게 있어 ‘가만히 있음’이라는 것은 움직임이 없거나 소리가 없는 것, 또는 두 가지 모두를 의미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그들은 하루 중 적어도 얼마 동안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느꼈으며, 그렇지 못한 날은 헛되이 보낸 날이라고 여겼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 가운데에서 당분간 우리를 소란스러운 세상에 두신다면 세상의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그분을 알 수 있겠지만, 우리는 역시 침묵 속에서 그분을 가장 잘 알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조상의 믿음이었고, 성경의 가르침이다. 또한 우리의 내적 확신도 ‘가만히 있음’에서 나오기에 우리에게는 가만히 있어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만인에게 동시대인(同時代人)이시기 때문에, 미친 듯이 활동에 몰입하고 시끄러운 기계음으로 충만한 이 시대에도 그분의 임재와 능력은 확실히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이 조용한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이나 유대 광야의 목자들의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만큼 가만히 있어야 하고, 그분의 음성을 믿고 그 음성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현대 사회의 소음 속에서도 우리는 공학자, 과학자 또는 건축가가 될 수 있고,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제트 비행기를 날게 하는 방법이나 백화점을 운영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스포츠 경기에서 우승하거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거나, 학위를 받거나, 공직자로 선출될 수도 있다. 문명사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적응하면 이런 것들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이 시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될 것이며, 그렇게 우리는 이 시대의 자녀들이 될 것이다.
주위 환경에 맞추느라 복잡한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게 될 때 소음은 사실 우리의 발걸음을 원활하게 해주기도 하며,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면서 단지 큰 음악소리를 따라 대중과 함께 행진하게 될 때는 큰 음악소리가 우리로 대중과 보조를 맞추게 하고, 걸음걸이에 약간의 즐거움도 더해줄 지 모른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은 수시로 변하는 표피적인 것들 아래에서, 그 속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다! 인간의 깊은 부분은 태고의 침묵 속에서, 소생케 하는 말씀이 임해 두 번째 출생을 선물해주길 기다리고 있다.
인간의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이 하나님에게서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 전체가 망가져 버렸고, 그 결과 육신적 본능과 인간의 임의적(任意的) 생각이 주도권을 잡고서 개인의 사고와 의지와 행동, 그리고 인류 사회를 이끌어 나간다.
육신적 본능과 인간의 임의적 생각은 ‘죽음의 무도회’라고 할 수 있는 섬뜩한 무도회를 만들어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사회’라고 부르면서 자연인으로서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대중적인 기독교는 신약의 신학 언어들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세상이 그려주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세상의 방법들을 열심히 따라 한다(물론, 세상조차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몇 가지 악한 짓들은 따라하지 않는다).
대중적인 기독교가 제시하는 그리스도는 액세서리 같은 존재요, ‘저 위에 계신 친구’요, 소란과 떠드는 소리가 다 사라져서 놀이터를 떠나 잠자러 가야 할 때를 대비해 붙들고 있어야 할 보증인일 뿐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본질적 사실들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여전히 과거의 인간 그대로이고, 인자(人子)는 과거의 그분이시며 과거의 그 존재이시다.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것’에게 소리치신다.
깊은 것이 깊은 것에게 소리치는데, 그 외침의 소리를 듣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 본연의 것’이다. 그 소리를 듣는 것은 야만적인 것도 아니고 문명화된 것도 아니다. 늙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니다. 서양적인 것도 아니고 동양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내면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까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분의 음성이 들릴 때, 그것은 신경이 곤두선 이 세상의 흥분된 외침 같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사 42:2)라는 예언의 주인공이신 분의 입에서 나오는 ‘평안을 주는 부름의 소리’일 것이다.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을 길거리에서 들을 수는 없지만, 우리의 마음으로 아주 분명히 듣는 것은 가능하다.
† 말씀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누가복음 5장 15,16절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편 62편 5절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 이사야 44장 18절
† 기도
하나님, 요란하고 변화무쌍한 세상을 따라 그저 본능과 인간적인 생각으로만 살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제 안에 있는 '영원한 것'에게 잠잠히 소리치시는 하나님!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로 결단하오니 저의 영혼을 소생케 하시며 당신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내어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파도같이 밀려오는 일상의 일들과 세상의 요란함에서 벗어나 잠잠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