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미레의 '우아한 묵상'

예배를 구경하는 구경꾼이 되고 싶지 않다! 온 '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예배는 지적이고 영적이기만한 것이 아니라, 몸 없이는 참여할 수 없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것이다.

스무 살이 되어 청년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1년 정도 헌금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 예배하는 중간에 헌금 바구니를 들고 예배당 뒤쪽 끝에서 맨 앞까지, 가운데 통로를 사용해서 걸어가는 역할이었다.

나는 발레를 했으니 관객들의 시선 속에서, 무대 위에서 걸어본 경험이 수없이 많았지만 예배시간에 걷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무대 위에서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원래 내가 하는 일이지만 예배 중, 그 정적인 공간과 시간에 나만이 움직임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굉장히 어색한 느낌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주일날 교회에 가서 드리는 예배는 각종 찬양들과 기도, 설교로 구성되어 있는 형식을 말한다. '예배'가 그런 형식을 지칭하는 단어일까?

예배의 헬라어 'Proskuneo'(프로스쿠네어)는 '프로스(~에게)'와 '퀴네오(입맞추다)'의 합성어로, 존경의 표시로 주인에게 머리를 숙이며 발에 입맞추는 것을 뜻한다. 영어 'Worship'은 가치와 신분의 합성어로, 존경과 존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를 뜻한다.

이런 맥락을 따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가치를 인정하며 그에 합당한 존경과 영광을 머리를 숙여 발에 입 맞추는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배는 어떤 정해진 형식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고, 듣고, 느끼고, 그분께 반응하는 것이 예배다(땅에 쓰신 글씨 中).

주일에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 반응하러 교회에 가는 것일까? 예배는 목회자가 드리고, 나는 그것을 구경하러 간다는 생각이 드는 게 과한 표현일까.

나는 모태신앙으로 주일에 교회를 가지 않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가정에서 자랐다. 평생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을 예배드리면서, 예배라는 형식 안에서 목사님의 설교가 클라이막스 혹은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배라는 단어의 뜻을 알고 나니 목사님이 성경에 대한 스피치(설교)를 하시고 나는 가만히 앉아서 듣는 것이 진짜로 내가 하나님께 반응하는 행위였는지, 혹은 반응하도록 하는 행위였는지,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30년간 내가 매주 드렸던 예배에서 내가 진짜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존귀와 영광을 드렸는지,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맞이하고 경배했는지, 교회에서 나에게 진짜로 그런 '예배'를 가르치고 제공했던 것인지 돌아보게 된다.

일반적인 예배시간, 우리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가끔 일어났다 앉거나, 입을 벌려 소리를 내어 성경을 읽거나, 찬양을 부르는 정도가 전부다.

그나마 찬양은 우리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예배 중에 내 입술과 목소리로 하나님께 고백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한다. 반응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음악이 우리를 예배에 참여시키는 아주 큰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나도 예배를 드리고 싶다. 예배를 구경하는 구경꾼이 되고 싶지 않다! 예배에는 관객이 없다. 모두가 예배를 드리는 참여자여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회중이 자신의 목소리로 찬양하고, 자신의 몸으로 움직여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맡았던 헌금을 담당하는 역할이 단순히 헌금 바구니를 앞으로 전달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움직임이 아닐 것이다.

버튼을 클릭해서 헌금을 계좌이체하는 것보다, 헌금을 준비하고 봉투에 넣어서 헌금함에 넣는 것보다, 헌금을 들고 예배 중 십자가를 향해 걸어 나와서 드리는 움직임은, 금액은 같을지라도 하나님께 헌금하는 나의 마음가짐과 인식을 새롭게 했을 것이다.

이처럼 예배 중에 행해지는 의미있는 움직임은 생각보다 다양할 수 있다. 우리가 찬양할 때 흔히 하는 움직임인 '손들기'가 있다.

튀는 것을 유독 어려워하는 한국인의 특성상 찬양 중에 손을 든다는 것은 정말 감정이 격해져서 반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 나오는 (거의 유일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예배 중 행해지는 가장 흔하면서도 큰 움직임으로는 '행진'을 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성찬식의 행진이 떠오른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나누는 이 거룩한 예식이 더욱 의미 있게 드려지기 위해서는 회중들이 가만히 앉아서 빵과 포도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성찬에 참여시켜 행렬을 예배 순서에 넣는 것도 권면할 수 있다(잃어버린 춤 中). 이것은 회중들에게 온몸과 마음을 다하는 특별한 성찬의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한 경우, 찬양과 함께 '움직임'을 사용할 수도 있다. 단순한 율동을 넘어서, 말씀을 몸으로 실현하며 다양한 감각을 사용하는 예배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라고 말하지만 내 옆에 앉아 같이 예배를 드리는 지체와 내가 진정으로 한 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가?

말로 풀어 설명하는 것보다 옆 사람과 손을 잡고 함께 움직이며 찬양하는 것이 훨씬 더 빨리, 깊게, 현실적으로 다가올 것이다(선교한국 예배에서 실현해 볼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다. 아래 동영상을 첨부한다).

예배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언어'는 물론 우리가 가장 손쉽게 사용하는 의사소통과 표현의 도구이다.

하지만 예배에서 전달되는 언어적 지식이 우리의 머리를 채울지는 모르나, 그 지식이 체화되어 진짜 우리가 몸으로 살아내는 삶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크리스천은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어 삶으로 증거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머리 한번 숙이지 않고, 무릎 한번 꿇지 않고, 심지어는 가만히 앉아서 졸기까지 하면서 드린 지난 주일의 예배를 통해 내 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각하며 살아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예배는 성찰의 시간이 아닌 행동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中). 이를 위해서는 예배가 지적이고 영적이기만한 것이 아니라, 몸 없이는 참여할 수 없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것임을, 예배에 나아오는 모든 이들이 몸을 가진 존재임을 다시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참고: 땅에 쓰신 글씨(Ivp), 잃어버린 춤(홍림),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Ivp)

글 = 김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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