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진학을 하고 싶었지만 목회일정이 매일 바쁘고 아이들이 한창 공부하는 중이어서, 어려운 살림에 나까지 진학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혀 가능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기도는 해야지!”
그래서 나는 이런 저런 기도를 다한 후에 맨 끝자락에 “신학을 심도 깊게 연구할 수 있게 대학원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덧붙여 기도해왔다. 기도는 하고 있지만 이루어주시리라고는 전혀 기대조차 하지 않으니까 마음도 편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 모교 교수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장학에 뜻을 가진 분이 대학원 3년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내겠다며 자신의 뜻에 적합한 학생을 추천해달라고 해서 나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대학원 진학을 하고 싶으면 진학하여 신학을 더 집중적으로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무언가 감추고 있던 것을 끄집어낸 듯 가슴이 뛰었다. 주님에게 기도한 것은 그 어떠한 것이라도 반드시 응답되는 것에 놀라고 또 놀랐다.
나는 너무 기뻐서 이 기쁨을 남편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자랑하며 남편에게 말했더니 의외로 단번에 거절이다. 나는 남편의 처사가 얼마나 야속한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학비도 장학금으로 다 마련되었는데 왜 안 되는데요?”
“사람이란 모든 일에 때가 있는 법이야.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어. 당신에게는 이젠 거둘 때지 심을 때가 아니라니까.”
“학문에 무슨 때가 정해져 있을까요? 배우는 것은 때가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이미 목회 현장에서 일하고 있잖아. 실전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신학의 깊은 학문이 뭐가 더 필요해. 목회 하는 데는 신학 4년 배운 것으로 이미 충분해.”
다른 것은 다 남편에게 순종하고 순종이 안 되면 복종하고 살아왔는데, 이번만은 오랜 동안의 나의 기도를 주님이 들으시고 배울 기회를 주신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좀처럼 포기가 되지 않았다.
“여보! 당신이 신학 하는 동안 제가 뒷바라지를 다했으니 이젠 당신이 내가 공부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세요.”
지나간 나의 공적까지 공치사하며 부탁하고 애원해 봐도 남편은 추호의 흔들림 없이 완강하게 반대했다. "남편은 반대하지만 나는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생각하고 식구들이 잠든 깊은 밤에 불기도 없는 추운 방에서 입시 공부를 시작했다. 성경, 영어, 철학, 논문이 입시 과목이다. 나에게는 영어가 제일 치명적이었다. 대학 때 배운 영어 자료들을 다시 꺼내 공부하였다.
◆ 시험 보는 날, 무슨 수로 시험장에 가지?
12월 6일이 입학시험 날이고 오전 8시에 첫 과목을 치른다. 그 시간에 무슨 수로 양지까지 갈 것인가? 새벽에 떠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남편에게 뭐라고 말을 하나? 나는 남편이 남편의 차로 시험 장소에 나를 데려다 주어서 시험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기도하면, 입시 준비 기간 안에 남편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남편이 마음을 바꾸어 대학원 진학에 찬성하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시험 날이 다 되었는데 남편의 마음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다. 나의 품에는 남편에게 말도 못하고 받아 놓은 수험표가 간직돼 있었다. 그런데 입시 바로 전날 남편은 내일 양지에 있는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캠퍼스에 간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은 나를 위한 행보가 아니라 우리 교회에서 일하고 있는 교육전도사님이 시험을 보는데 그 전도사를 격려하고자 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에게 “당신도 동행하지!”라고 말했다.
나는 부지런히 수험표를 챙기고 펜도 준비했다. ‘내일 시험을 보게 된다면 그것도 기적이야! 주님이 허락하시는 데까지만 가는 거야.’
시험 보는 날 새벽! 남편은 시험을 치르는 전도사를 뒷자리에 태우고 나는 앞자리에 타라고 했다. 전도사님과 남편은 내가 아무도 모르게 입시 준비를 해왔고 오늘 시험을 보게 되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차가 한창 중부고속도로 지날 때 남편은 그 전도사님에게 선배로서 입시에 관한 주의사항을 일러주고 있었다. 나는 자는 척하며 그동안 공부했던 것들을 머릿속으로 차분히 정리하였다.
양지캠퍼스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7시 30분이었다. 그 전도사님은 서둘러 자기 수험 번호에 해당하는 수험실로 들어갔다. 나도 어서 들어가야 할 텐데..., 마음속에서 조바심이 났다. 남편의 눈치를 보는 시간이 25분이 흘러 시험 시작 5분 전이 되었다.
너무 조급해져 눈물이 나려고 했다. “네가 남편의 차로 시험 보는 데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지? 그대로 해주었는데 왜 울려고 하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런 말씀이 울려왔다. “주님! 지금 시험시간 5분 전인데 저는 어떡해요.” 골똘히 마음의 대화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 나를 툭 친다.
“여보! 저 전도사님은 점심시간까지 줄곧 시험을 치를 텐데 우리는 목욕이나 갔다 올까?” “당신 혼자 다녀오세요. 나는 도서실에서 책을 보고 싶어요.”
“그래? 할 수 없지 뭐! 그렇다면 나 혼자 갈 수 밖에! 그럼 점심시간에 이곳에서 만나!”
남편이 떠나자마자 나는 바람처럼 쌩쌩 달렸다. 시험장에 도착하니 시험지를 나누기 직전이었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거룩하게 시험 보도록 묵상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기도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나는 남편의 차를 타고 시험장에 왔고 지금 입시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 논문 시험 다시 볼 순 없을까?
오늘은 성경과 영어 시험을 치르고 내일은 논문과 철학시험을 본다. 오늘 시험에 합격해야 내일 시험을 치를 자격이 주어진다. 주님은 여기까지 나를 도우셨고 나에게 여기까지 허락하신 것이다. 주님이 걸으라는 곳까지만 걷는 것이다.
여기서 멈추라면 멈추는 것이다. 나는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남편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미리 가 있을 수 있었다. 남편은 시험을 보느라 발갛게 상기된 내 얼굴을 보더니 “오늘 시험을 보는 수험생은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데 방청객인 당신이 왜 더 긴장했냐”고 웃음을 터뜨린다.
저녁 무렵 합격 전화를 받았다. “야호! 할렐루야!” 너무 기뻐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터뜨렸다. 남편이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본다. 아! 그래도 감출 수 없는 이 기쁨을 어이 하리! 그러나 기쁨도 잠깐이었고 기쁨의 분량만큼 걱정이 밀려왔다.
오늘은 전도사님 덕분에 아침 일찍 시험장에 갈 수 있었지만 내일은 어쩌면 좋을꼬! 아무런 대책도 없는 그 밤에 기도 반, 입시 공부 반으로 밤을 새웠다. “그래! 내일도 주님이 허락하시는 곳까지만 가자.”
드디어 시험 둘째 날이 왔다. 길을 떠날 아무런 명분이 없어 초조히 기다리고 있는데 새벽 기도를 마친 남편이 아침 일찍 등산을 간다고 길을 나섰다. 나는 남편의 차 소리가 멀어지기도 전에 “걸음아! 날 살려라!” 숨이 목에 차도록 뛰었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남부터미널에서 양지로 가는 고속버스를 기다렸다.
첫 차를 탔으나 아무래도 8시에 도착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양지에 도착한 시간이 이미 8시였으니 시험장까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뛰어간 것일까? 논문 시간에 글을 쓰는 손은 달달 떨렸고 땀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 내렸다.
서론 부분만 썼는데 시간이 끝났단다. 둘째 시간 철학 논술 시험은 마음에 흡족하게 잘 썼지만 논문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며 기도했다.
“주님! 논문을 다시 쓸 수는 없을까요? 저는 다른 과목의 실력이 취약해서 논문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데 이를 어쩌면 좋아요?”하지만‘아마 그토록 공부하고 싶어했더니 주님이 내가 너무 불쌍해서 시험이라도 한 번 치러보라고 했나보다’하고 마음을 비웠다.
하지만 합격 발표가 나는 날은 나도 모르게 안절부절하였다. 저녁 때까지 발표가 늦어져 가슴을 태우더니 논문 출제에 문제가 생겼다는 공지와 함께 이틀 후에 논문 시험을 다시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시험 장소는 양지가 아닌 서울 사당동 캠퍼스란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 장애물이 있어도 반드시 가야 할 길은
이틀 후 재시험 논문 제목을 보는 나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왔다. 그것은 대학 때 내가 쓴 논문 제목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앞 뒷장에 깨알같이 써내려간 답안지를 내놓고 시험장을 나오며 주님이 나를 반드시 대학원에 진학하게 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밀려왔다.
나의 합격소식은 남편이 먼저 알게 되었다. 기독신문에 발표된 합격자 명단을 보고 시누이의 남편인 박 목사님이 우리집에 축하 전화를 걸어준 것이다. 남편은 아마 동명이인일 것이라고 하다가 내가 시험을 치른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신학을 향한 나의 열정을 도저히 말릴 수 없으니 목회와 가정과 아이들에게 티끌만큼의 소홀함이 없게 하고 공부할 것을 단단히 다짐 받은 후에야 진학을 허락하였다.
이렇듯 어렵게 입학한 나는 다른 원우들처럼 양지기숙사에 있지 못하고 매일 서울에서 양지까지 통학을 했다. 신체나 여건 모든 면에서 열악하고 힘든 상태에서 공부하게 되었지만 그럴수록 신학에 대한 나의 열정은 뜨거웠고 강의 듣는 태도는 진지하였다.
나 때문에 불편한 모든 것을 감내하는 남편과 아이들과 성도들이 너무 고마워 단 일분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강의 시간에 느껴오는 감사와 감동으로 울면서 강의를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새벽기도 2시간 전에 일어나 밥과 반찬을 해놓고 거의 매일 밤을 새우며 공부하는 3년이 흘러 남편과 아이들과 성도들의 축하를 받으며 감격의 졸업을 하게 되었다.
어떤 일이든지 이루고자 할 때에 어려움이 가로막는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허락하시는 데까지는 반드시 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장애물 뒤에 숨겨 놓은 주님의 뜻을 알기도 전에 미리 포기하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기 때문이다.
유정옥
서울역 노숙인을 섬기는 소중한 사람들 회장, 인천 인일여고와 총신대학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로《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가 있다. 소중한 사람들 www.sojoongha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