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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미레의 '우아한 묵상'

예배와 몸, 창조주가 내 몸을 바라보시는 시각

몸으로 하는 예배, 무엇을 하느냐 VS 어떻게 하느냐

7살 가을, 발레를 처음 시작했고 무용학원과 예술고등학교, 대학교 무용과까지 무용수를 만들기 위한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자랐다.

대부분 발레 교육은 선생님이 동작을 보여주면 따라하는 형식이었다. 그래서 무용홀은 언제나 거울로 둘러싸여 있고, 학생들은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체크하면서 관객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집중해서 연습한다.

'다리를 어디까지 들어야 가장 예쁘게 보이는지, 팔을 어떤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지, 점프를 어느 정도 높이로 뛰어야 가장 멋있는지'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사실 움직이고 있는 내 몸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다.

대부분 무용수의 몸은 조금 더 높은 수준의 테크닉을 더 잘 수행해내기 위해서 반복 훈련을 받는 대상이거나, (몸 보다 우위에 있다고 하는)정신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취급받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몸학(Somatics)'이라는 학문에서는 이원론이 발생되기 이전에 사용되었던 단어인 '소마(Soma)'를 사용한다. 우리말로는 '몸'으로 번역된다.

몸학은 몸을 물리적인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지성과 감성, 영성이 통합된 삶의 현장으로 본다(참고 - 움직임의 길을 찾아, 토머스 한나 저).

나는 이런 시각을 바탕으로 무의식적인 망각의 상태로 몸을 반복하며 훈련시키는 것에서, 나의 몸의 움직임을 인식하고 누리며 춤추는 것으로 요점을 변경할 수 있었다.

내 몸을 통해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에 더 관심과 초점을 두어도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다리를 높이 들고, 점프를 더 높이 뛰고, 턴을 더 많이 도는 것만이 무용수의 목표여야 한다면, 나이가 들수록 늙어가는 우리의 몸은 희망이 없다. 계속해서 더해가는 절망뿐이다.

똑같은 동작을 해도 모양을 따라하는 것과 내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인식하면서 춤을 추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런 느낌이 관객에게까지 전달되는 것은 2차적인 문제였고, 우선적으로 춤을 추는 나 자신이 살아있고, 존중받고, 주체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한 변화였다.

이제는 내 몸 각각의 부분과 움직임들을 더 주의깊게 감각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나는 연습시간에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몸의 각 부분부분 지어진 모양과 필요한 기능, 움직여지는 모양, 다른 부분으로 연결까지, 그 어느 하나 동일한 부분이 없고, 틀린 부분도 없고, 어쩜 그리 놀랍도록 완벽하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몸을 움직이는 순간순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주님의 형상을 닮은 몸을 주셨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기 전까지 가장 오랜 시간 내가 소유하는 유일한 것이 바로 나의 몸이다.

태어나는 순간 호흡을 하며 폐가 움직여지고, 손끝과 발끝까지 심장의 움직임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다가, 죽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정지된다.

태어나고 죽는 것,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정의하는 것이 바로 '움직임'이다. 그렇게 우리는 평생을 움직이며(춤추며) 산다.

나는 춤을 못 춘다고, 몸치라고 하지만 이미 우리는 몸을 움직여 춤을 추고 있다. 춤은 테크닉이 아닌 몸의 움직임이다.

몸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면서 내가 춤추는 의미에 대해 다시 확인했다. 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중에 가장 아름답고 신비한 '인간의 몸'이 주된 도구다.

주님이 주신 우리 몸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누리며 움직여 춤을 추는 것은 이 땅에서 몸을 가지고 사는 동안 인간이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온전한 예배가 아닐까 싶다.

하나님께서 내 몸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나의 몸을 바라보면서, 내가 아름다운 피조물임을 마음껏 누리며 만들었던 무용작품 <아름다운 피조물>을 소개한다.

글, 사진 = 김미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