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하면 요정같이 가볍고, 여성스럽고, 가녀린 움직임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보면 발레는 우아하거나 아름답기만한 춤이 전혀 아니다. 엄청난 근력을 필요로 하고, 힘을 제어해서 몸안에서 사용한다. 그래서 밖에서 보기에는 우아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곤 한다.
발레리나의 움직임이 아름다워보일 수 있는 이유는 온몸을 자신의 의도대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대에서 보여지는 시간의 10배, 20배 아니 100배쯤 되는 시간을 연습실에서 보낼 때 발레 무용수들은 자유를 포기한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엄격한 훈련을 감수하기로 결정한다. 그런 결과로 별로 힘들이지 않고, 아름답게 움직이는 것같이 보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자유를 포기하고 더 큰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피아노를 치는 것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겨운 하농(Hanon)에 내 손가락의 자유를 내주고 나서야 더 큰 자유를 맛보게 되는 것이랄까^^)
억압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연습시간이 다행히 괴롭기만 하진 않다. 특히 처음 발레를 하는 사람들은 평생 그곳에 있는지도 몰랐던 근육을 움직이고 유연하게 하는 것이, 아프면서도 신기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즐겁다고 한다(와우! 몸을 움직이고 알아가는 것이 즐겁다니!)
왜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일까? 아마도 핸드폰도, 컴퓨터도, 책도 없이 그냥 나를, 내 몸을 움직이면서 '노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그야 말로 안식하는 것 아닐까!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 노는 것이다(놀이의 신학).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았더라' 하면서 안식일에 누리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만드신 몸을 이리저리 구석구석 살펴보고, 애정을 가지고 움직이고, 즐거워하며 누리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창조물을 마음껏 누리며 즐거워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안식일에 하셨던 것과 가장 비슷한 행위가 아닐까.
몸을 가지고 노는 시간은 실용적이거나 생산적이지 않을 수 있다. 즉, 무용(無用)하다.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유용해야만 한다고 말하지만, 나의 존재 나의 몸은 생산적인 용도 없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있다. 춤의 한자어가 무용(舞踊)인 것이 우연치고는 퍽 재미있게 다가온다.
발레하는 중, 포즈를 잡고 발란스를 잡기 위해 잠깐 멈춰 집중하는 순간. 나의 온'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이 하나되는 순간을 종종 만나곤 한다.
반 데어 레우(van der Leeuw)가 말했던 '춤 속에서 몸과 혼의 경계가 소멸된다'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었나보다. 나는 영적인 존재일뿐 아니라 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춤추며 안식할 때마다 즐겁게, 자연스럽게 확인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