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유기성 영성일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유기성 영성칼럼

유기성 영성칼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2)

말도 때를 잘 살펴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말하기에 적절한 때인지 아닌지 살펴서는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전도가 그렇습니다.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때도 전도는 해야 합니다. 핍박을 받는다 해도 전해야 합니다. 언제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 주세요.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였던 때가 있었습니까?  그런 때가 오기를 기다려 전도했다면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를 대동강에서 죽였음에도 선교사들은 계속 이 땅에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불신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필요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을 처음 깨달았을 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죄책감만 없애 주는 나약하고 값싼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죽고 다시 사는 처절하리만큼 선명하고 강력한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복음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것 같았습니다. 그 때 기독교 서점에는 '긍정'과' 축복'과 '평안'을 강조하는 책으로 넘쳐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는 주님의 강권하심이 너무나 강하였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이 복음을 증거하고 또 증거하며 지금까지 왔습니다.

‘꼭 그렇게 믿어야 하느냐?' 하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복음의 열매가 놀라왔습니다. 복음이 사람과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저 자신이었습니다. '24 시간 주님과 동행하라'는 메시지도 듣지 않으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일기까지 써 보라고 하면 웃기만 하지 반응이 없습니다. 지금은 이 메시지가 매력이 없는 때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번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고 강권하십니다.

특히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위하여 재촉하십니다. 지금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시 오실 주님 앞에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면서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을 다시 만나야, 반갑고 기쁠 것이 아닙니까?

한번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을 만난다면 얼마나 어색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다시 오실 주님을 처음 만난 분처럼 만나게 될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때를 얻지 못한 것 같아도 이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사랑도, 순종도 때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오직 기준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라 하시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진정한 복은 평안도 풍요도 성공도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의 마지막 축복의 말씀이 제게 주시는 주님의 축복이었습니다.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딤후 4:22)

바울 사도의 축복기도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