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하며 살아갑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질문이 끊이지 않는 것 같고요
전에 <강교수의 철학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철학'하면 늘 어렵다고만 생각했거든요. 강영안 교수가 말한 철학은 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철학과 신앙이 결합될 수 있고 왜 철학을 읽고 고민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으니까요
'기독교인도 인문학을 해야 돼? 말아야 돼?'와 같은 애매한 고민들에 대해 해본 적 있지 않으신가요?
기독교방송 CBS에서 새해를 맞아 철학자 강영안 교수와 이야기 나눈 영상을 통해 위와 같은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해요
어떻게 기독교인이면서 철학을 합니까?
또 철학을 하면서 어떻게 기독교인이 될 수 있습니까?
- 머리를 쓰는 것은 신자든 불신자든 다 쓰는 것입니다. 이성적 추론과 논리적 사고 과정은 누구나 동일합니다. 어떤 신앙의 바탕에서 하는가? 그게 중요하죠
철학과 신앙의 대립이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어떤 신앙의 바탕에서 철학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주의적 세계관 바탕을 둔 철학과 초자연주의적 세계관 바탕을 둔 철학 사이에 대립이 있을 순 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어떤 방향에서 어떤 세계관과 틀을 가지고 생각하고 이론을
구축을 해나가느냐가 문제가 되겠죠
인문학적 사고와 인문학적 질문은 기독교 신앙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 인문은 '사람의 문'이란 뜻입니다. 삶에서 경험하는 희로애락, 인간의 무늬를 언어와 몸을 통해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삶의 문제와 떠날 수 없는데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가 두 하인과 동생과 함께 산을 올라갑니다. (프란체스코는 단테, 보카치오 등과 함께 이탈리아 문예부흥기를 대표하는 세 거장의 한 사람)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다가 가방에 가져온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펼쳐 봅니다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서 산, 파도, 강, 바다, 별을 보며 놀란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제10권 8장)
마치 위의 예화처럼 인문학을 알수록 하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참된 인문학은 인간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존재를 만드신 하나님을 향합니다. '인문학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대한 고민이 아닙니다
사람이 남긴 무늬를 읽을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의 삶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을 하나의 텍스트로 삼아서 세상을 새롭게 읽어내고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에게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성경을 읽으세요?
맥체인성경읽기표 따라 읽습니다. 최근에는 한 책을 정해서 집중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전도서를 잘 보고 있습니다 전도서 12장 12절 많이 읽는 것보다 읽고 또 씹고 씹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답만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질문이 엄청 많으신 분이세요. <예수께서 물으신 모든 것>의 저자가 예수님의 질문 숫자를 셌더라고요. 놀라지 마세요. 무려 305번의 질문이 있습니다
제대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행함입니다. 많이 읽고 매일 읽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그것이 성경의 마침이고 율법의 이룸이며 우리 읽기의 목적이라 생각합니다
영상 = 새롭게하소서
맥체인성경읽기표 성경본문과 읽기를 한번에 할 수 있는 어플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