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삶이 변화될 수 있겠습니까?
한 집사님이 심각한 얼굴로 찾아와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정말 성실한 신앙인이 있다면 우리 남편 한번 만나게 해 주세요”
남편이 말하기를 ‘그동안은 가족들의 요구에 따라 교회를 다녔었지만, 이제 나 스스로 교회 다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고 싶다’고 하였답니다. 남편이 가진 문제는 “왜 내 주변에는 제대로 신앙생활하는 이들이 하나도 없느냐?” 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복음을 몰라서 전도가 필요하다면 가서 전도해 줄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삶이 온전한 “진짜 그리스도인”을 보고 싶다고 할 때는 누구를 보낼 수 있을까?
예수님을 믿는데, 왜 삶은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요?
한국 교회의 문제는 교인의 삶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왜 삶은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요?
주님은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1) 하시면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 (마 6:32)고 하셨습니다. 먹고 입는 문제로 더 이상 염려하지 않는 믿음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오른 뺨올 맞으면 완 뺨도 돌려 대라’ 고 말씀하십니다. ‘속옷올 빼앗아 가려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챙겨 주라’ 고 합니다. ‘오리를 억지로 끌고 가려는 사랍과 십리를 기꺼이 가 주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힘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그 능력은 우리 안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주님과 연합한 자가 아니면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능력은 우리 안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주님의 산상수훈은 그 가르침대로 살아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산상수훈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살아야 한다’ 가 아닙니다. ‘살아진다’입니다. 행위를 강조하는 것 같지만 그러한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마음 상태, 곧 예수님과 하나된 새로운 관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아니라 복음인 것입니다.
개인적인 영성을 바로 형성하려는 노력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뿌리와 열매와 같은 관계입니다.
진정한 개혁은 행동을 바로 잡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바라 잡는 것이어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 보다 그 행동이 드러나기 전의 뿌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빛이 아니면서 어찌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겠습니까? 소금이 아니면서 어찌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겠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삶은 수도원에 들어가야만 가능해서도 안됩니다. 잠시 어느 기간만 할 수 있는 것이어도 안됩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삶은 일상 생활에서 가능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과 연합한 자로, 친밀히 주님과 동행할 수 있겠는지 목회적인 시도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경험한 좋은 방법이 있다면 공개하고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매일 일기로 점검해 보며 서로 나누면서 함께 이 길을 가보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