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장례식에 온 것 같이 예배를 드리고 어떤 이는 댄스 클럽에 온 것 같이 예배를 드린다. 어느 쪽이 옳은가?
어떤 이는 노래하고 어떤 이는 춤춘다. 어떤 이는 조용하게, 어떤 이는 염려하며, 어떤 이는 경건하게, 어떤 이는 주저함 없이, 어떤 이는 기쁨에 차서,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린다.
어찌됐든 우리는 각자의 삶의 상황에 따라서, 자라온 환경에 따라서, 기준에 따라서 하나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성향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나는 매우 궁금해진다.
물론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만날수 있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의 성향대로 초점을 맞추어 자신만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릴 때, 즉 자기가 이해하는 대로 또 자기만의 좁은 기준으로 전우주를 창조하신 유일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끼워 맞출 때 그 위험성은 커진다.
왕 혹은 친구?
질문을 던져보자. 하나님께 왕 또는 친구처럼 예배드려야 하나? 우리는 하나님이 왕중의 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따스하게 불러주신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찬양으로 예배를 드릴 때 어느 한 쪽을 고르고 싶어 한다.
시편 2편 11절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크게 기뻐하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보듯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찬양하는 것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어떻게 정확히 해야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기뻐할 수 있을까? 시도해보면 쉽지 않다.
지난 세대를 돌이켜보면 진실하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노력보다는 유행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보인다.
3백 년 전, 예배는 엄숙한 외침들과 삶과는 무관해 보이는 형식들로 가득차 있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 친숙하고 편하고 인기 있는 찬양 예배가 주를 이룬다.
하나님은 왕이면서 친구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시점에 한쪽으로만 우리가 규정하려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능할까? 하나님은 친구이자 왕이다. 아빠이자 아버지이다. 사랑하는 사람이자 왕이시다.
말씀을 통한 예배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방법을 바꿔야 할까? 인간 마음대로 하나님을 규정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의 계시를 통해서 놀라우신 전능한 존재에 다가가면 어떨까? 이상하게 들리는가?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기쁨과 두려움, 친숙함과 경외감, 표현과 침묵, 찬양과 탄식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있는 우리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전도서 3장 1절~8절(NLT)의 말씀을 좋아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대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이 구절로 힘을 얻기도 하고 마음이 힘들 어지기도 하는가? 나는 전쟁, 눈물, 침묵과 같은 말들 보다는 치료, 안기, 말하기 같은 말들에 의미를 더 둔다. 솔로몬은 이런 모든 일들이 특별한 시점에 생긴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다양한 방법의 예배
이 구절을 우리가 예배에 다양하게 적용 할 때 그 의미는 매우 의미심장해진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예배할 때 춤출 때가 있고 정지할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도 있다. 평화로울 때가 있고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소리높일 때가 있고 침묵할 때가 있다.
물론 나는 우리가 각자의 개성대로 다양하게 예배하는 아름다움을 없애버리고 모두 같은 방식으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유일한 존재로 만드셨다. 하지만 우리 마음대로 독단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하나님은 우리를 타고난 자아를 넘어선 존재로 불러 주신다.
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나의 본성이 아니다. 적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아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도 내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성령에 의해서, 성령을 믿고 그리고 진실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계시를 통해서 예배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전부를 경험하기 위해서.
편안함에서 벗어나라
누군가는 “나는 소리치며 예배하는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물론 이해가 된다. 나는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베풀기를 요청받는다.
나는 태생적으로 겸손하지도 않지만 자존심을 내려놓기를 요구받는다.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가 자신들을 여리고로 인도하기 전에 “아, 여호수아시여, 난 소리치는 타입이 아닙니다. 그렇게는 잘안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상상해보라.
누구나 외친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전력을 다해서 믿음으로. 이 말이 완전히 이해되는가? 아닐 수도 맞을 수도 있다.
평범함을 거부하라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에 복종하면 큰 복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범함으로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로 만드신다. 하나님은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를 도와주신다. 평화대신 전쟁으로 상처받는 우리를 도와주신다. 용기가 없어서 힘들어 하는 우리를 도와주신다.
하나님을 왕으로만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아빠와 같은 존재로서 우리들을 아들과 같이 대할 때 나눌 수 있는 친밀감과 우정을 잃게 되지 않을까?
그럼, 단지 친구처럼만 하나님을 대하면 어떨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절대자이심을 간과하고 주권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점은 하나님은 단지 한 존재가 아니시라는 것이다. 그는 전부이다. 그는 신랑이자, 코치이며 판사이기도 하다. 그는 친구이며 선생님이고 지도자이다.
그는 형제이자 상담가이자 장군이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전력으로 대할 때, 우리 마음대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씀과 더불어 함께할 때,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고 돌보시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
Jeff Deyo
제프 드요 (Jeff Deyo)는 예배 인도자, 아티스트, 저자, 배우, 그리고 교수이다. 국제적으로 ‘소닉 플러드(Sonic Flood)’의 메인보컬로 알려져있으며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I Could Sing of Your Love Forever”와 “In the Secret” 곡들을 부른 사람이기도 하다. ‘Pure Worship Institute(PWI)’의 설립자이기도 하고 현재는 미네소타 주 미네아폴리스에 위치한 North Central University의 College of Fine Arts에서 풀타임 교수로 섬기고 있다. 1992년도에 아내인 Martha와 결혼하여 현재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