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워십리포트

예배와 우상숭배 _조준모

1 / 들어가며

소년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누구나 동의할만한 대답은 소녀이다. 왜 소년의 반대말은 아줌마가 아닐까? 왜 강아지나 돌이 아닐까? 인간의 언어에서 반대말이라는 개념은 참 특이한 개념이다.

소년과 소녀가 서로 반대말이 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단어의 의미 영역이 거의 다 같기 때문이다. 특정 단어의 반대말이 되기 위해서는 그 단어와 거의 모든 의미 영역에서 동일한 자질을 갖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하나의 주요 의미 자질이 달라야만 한다.

그래서, 소년과 소녀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의미가 같고 한 가지 주요 부분의 의미, 곧 성별의 의미가 달라서 반대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반대말과 비슷한 말은 한끝 차이이다. 그러면, 예배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예배의 반대말은 우상숭배이다. 이 두 단어의 차이점은 그 예배의 대상에 있다.

우리가 주로 예배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해하는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그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 아닌 것이 되었을 때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예배는 하나님 예배이며, 우상숭배는 우상 예배인 것이다.

 

역대하 33장을 살펴보면 유다의 왕 므낫세에 관한 역사의 기록이 있다. 3절은 므낫세 왕이 우상을 위하여 산당과 단을 세운 것을 묘사한다.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대하 33:3) 유다의 왕이 우상을 위하여 단을 세운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놀라운 것은 그 이후의 기록이다. 므낫세 왕은 그 우상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성전 안에 세웠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영영히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에 단들을 쌓고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단들을 쌓고” (대하 33:4,5) 성경기자는 하나님의 성전을 지칭할 때 “내 이름을 영원히 두리라 약속하신 (4절, 7절)” 곳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의 말씀이 있는 그 곳에서 바로 우상숭배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고 (곧 예배하고) 섬기는" 일이 하나님 한 분을 섬기고 예배하도록 지어진 바로 그 성전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영영히 두리라고 약속하신 바로 그 성전에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바로 이 행악함은 이스라엘 백성 주위의 이방 백성보다 더 심하였다고 기록한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대하 33:9)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호세아 2장 16장에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하는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호 2:16)

 

하나님께서 그를 반역한 백성에게 회복의 날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 날에는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내 남편이라’라고 부를 것이고 더 이상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신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을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바알, 곧 풍요의 신을 하나님 섬기듯 섬겼다는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런 행악함이 구약시대에 가능하였다면 현재 우리 삶에는 어떠할까? 여전히 그 가능성은 존재할 것이다.

예배와 우상숭배가 반대말이라면 이 두 행위는 지극히 비슷한 개념일 것이며 그 차이도 미세할 것이다.

누군가를 예배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섬긴다는 말이며 그 사람이 나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예배의 대상이 그 누가 될 수도 있지만 그 무엇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지은 “당신은 예배자”라는 노랫말이다.

당신이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당신은 예배자
당신이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간절한 예배자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종교가 있든 그렇지 않든
누군가를 섬기고 있지, 무언가를 예배하고 있어

당신은 예배자 간절한 예배자

누구는 돈을 누구는 편리를
누구는 명예를 누구는 지위를
누구는 쾌락을 누구는 느낌을
누구는 성공을 누구는 안정을
섬기고 있지

누군가를 섬기고 있어
무언가를 예배하고 있어

그래서 당신은 예배자

우리는 하나님을 갈급해하여 그분을 만나고자, 그분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구하고자,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자 예배의 처소로 모인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곧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부르는 교회는, 진정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2 / 교회 안의 우상숭배

그리스도인의 개인의 삶과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의 현실 가운데 현재 우리가 허락한 우상들은 있을까? 만약 있다면 어떤 우상들이 있는가?

지난 몇 년간 한국교회를 지켜본 결과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특별히 우리를 유혹하는 우상이라고 생각한다.

돈 (경제제일주의), 성공 (성공제일주의), 권력, 인기, 명예, 안락, 편리, 쾌락

우리는 돈에 상당히 약하다. 돈이 중요하다고 굳이 말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의 행동은 여전히 돈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우리의 결정은 돈 중심적이다.

한국교회는 비교적 돈이 많은 교회이다. 한국교회 안에 빈부의 차이가 사실은 엄청나지만 (국내의 약 80%의 교회가 미자립 교회인 것을 기억하자) 다른 국가의 교회들과 비교한다면 한국교회는 비교적 부유하다.

문제는 돈이 많은 것 자체가 아니라 돈이 많기 때문에 무언가를 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반대로 가난하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도 역시 문제이다.

한 예로, 한국교회는 한국의 경제적 성장이 선교에 반드시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을 여과없이 하곤 한다. 지난 수백 년 동안 행하여진 서구교회의 경제, 권력중심적 선교의 오류를 그대로 범하려 한다.

한국의 국력, 경제적 성장과 한국교회 선교와의 상관관계는 매우 조심스러운 질문이며 지혜로운 성경적 혜안이 필요하다.

우리는 또한 명예에 약하다. 교회 밖에서도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유명해지는 것을 너무도 좋아하고, 심지어 유명해져야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웃지 못할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높은 위치에 있고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필수 조건인가? 높은 위치에 있으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런 생각이 성경적인 것인지 하나님 나라의 원리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교회 안에서조차 호칭과 직분을 혼동하는가? 장로와 집사는 직분이다.

그것이 호칭으로 사용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음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은 (교수, 변호사, 의사 등)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같은 호칭으로 종종 쓰이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직명은 교회 안에서도 쓰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계급주의 문화가 어떻게 아직도 교회 안에 그대로 있는가? 왜 연예인이 예수를 믿으면 간증할 기회가 더 많아야 하는가? 왜 좋은 대학에 진학한 학생이 더 많은 주목을 받아야 하는가? 이 모든 이유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높은 위치와 유명세가 하나님 나라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은 아닌가?

영성은 반 지성적이지도 반 경제적이지도 반 성공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고상한 지성을 가졌을 때에, 사회적으로 높은 명망을 얻었을 때에, 사회적인 성공을 이루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성경에는 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을 소개하는가 하면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주의 길을 예비하다 비참한 죽음을 당한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하나같이 요셉과 같은 사람만을 이야기 하는가?

돈, 명예, 성공, 쾌락... 이런 것들이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 되었을 때, 곧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아닌 우상을 예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을 누가 혹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결정의 순간에 어떤 요소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우리는 누구의 눈치를 보는가? 우리는 어떤 요인을 너무도 당연히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개인의 삶에서는 물론이고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의 방향성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결정요소인가? 교회 안에서의 돈과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성공의 여부가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가?

 

3 / 예배 안의 우상숭배

더 나아가 우리가 드리는 공동예배 가운데에서 우상숭배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의 자리에서 타락한 루시퍼를 고려해 보면 이런 자문의 자세는 반드시 필요하다.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는 시점에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세 가지 유혹을 받으셨다. 그 첫 번째 시험은 적절성에 관한 시험이었다. 이 세상에는 많은 필요들이 있다.

복음은 그 필요에 적절하다. 그러나, 표면적 필요를 충족하는 것에 대한 유혹은 항상 우리를 따른다. 표면적 필요의 저변에는 근본적 필요가 있다.

근본적 필요를 무시한 채 표면적 필요 충족에 머문다면 그것은 결코 복음적 사역이 아니다. 그 두 번째 시험은 사역의 화려함에 관한 유혹이다. 높은 성전에서 뛰어내릴 때 천사들이 그를 받아 준다면 우리의 사역은 얼마나 수월했을까?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의 수준으로 내려오신, 낮고 천한 말구유에 태어나신, 세리와 창기와 함께 하신, 멋진 전차가 아니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하나님의 성육신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 두 번의 유혹을 물리치시며 시험을 통과하신 예수님께서 받으신 마지막 시험은 예배에 관한 시험이다. 어떻게 예수님에게 예배에 관한 시험이 있을 수 있는가? 믿기 어렵지만, 예수님이 하나님 외의 다른 것 곧 사단을 예배하도록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 그 시험의 내용은 한마디로 ‘이 세상나라의 영화로움’의 유혹이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 4:8-11)

예배와 세상나라의 영화로움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사단은 높은 산 위에 올라서 모든 왕국과 그 영화로움 곧 그 화려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단을 예배하면 그 영화로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그 저변에는 이 세상에서 멋있어지고 싶은 유혹, 곧 이 세상의 영광을 취하고 싶은 유혹이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영화를 누리기 원한다. 인기를 얻기 원한다. 수없이 많은 시간에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사역’을 할 때에도 멋있게 보이기를 원하는 유혹이 있다.

화려한 것을 선호한다. 세상의 화려함과 영화로움을 원하면 사단에게 엎드리는 것과 같다. 그것은 결국 사단을 예배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둘 수 없다. 하나님만 예배하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속적으로 이 세상의 왕국과 그 영화로움을 갖고자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다.

이 세상왕국의 영화를 좇을 때 우리 예배 안에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자.

 

3-1 / 화려함과 거대함

이 세상의 영광을 좇을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화려함과 거대함을 신봉한다. 예배 안에는 영화로움이 있다. 그 영화로움은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영화로움이다.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이 세상에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그분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으로 우리 가운데 좌정하신다 (시 29편 2절).

이 영화로움은 우리의 영광이 아니고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영광이 아니다. 예배가 점점 인위적으로 화려해지고 있으며 거대해지고 있다.

예배 안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이기보다 사람과 이 세상왕국의 영광으로 채워지고 있는지 우리는 유심히 바라보아야 한다.

자극적이며 화려한 음악, 영상, 조명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왕국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인지 아니면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함인지 가늠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이 모든 것들이 과연 예배의 정신을 담고 있는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3-2 / 상업주의

이 세상의 영광을 좇을 때 우리는 상업주의에 빠지게 된다. 예루살렘 입성 이후 예수님께서 하신 첫 사역 중 하나는 성전을 깨끗게 하신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성전을 깨끗게 하셨는가? 그 성전 안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거기에는 상업주의가 득실거리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자. 사고파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성전의 뜰 안에 상품들이 오고 갔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 가운데 우상을 섬기게 되면 놀랍게도 예배가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변질되어간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예배에 참여하는 자를 예배자로 바라보기보다 관중으로, 더 나아가 소비자로 취급한다. 진리를 선포하는 것보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그들에게 일차적인 감동을 주고 지적인 자극만을 주려고 노력한다

. 찬양인도자는 성도들이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도록 수종 드는 거룩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런데 예배자를 소비자로 보는 그 견해는 그들에게 인위적인 자극으로 ‘은혜를 끼치려는’ 노력을 낳게 한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너무나도 고귀한 결과물들이 있다. 하나님과의 만남인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치유를 경험한다, 기쁨을 얻는다, 놀라운 힘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예배의 결과물들이지, 예배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위로를 위하여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기쁨을 얻기 위하여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사실 위에 나열한 결과물보다 더 중요한 예배의 결과물은 순종일 것이다. 순종과 함께 하지 않는 위로와 치유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업주의는 예배를 이벤트화한다. 그래서 예배가 관중들을 충분히 사로잡기에 아주 잘 꾸며진 뮤지컬같이 보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관중들을 위하여 꾸며지며 모든 것이 무대 중심적이다. 심지어 무대나 스테이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까지 한다.

그 무대의 중앙은 찬양팀과 악기들로 가득 차있고 무대의 가장 큰 부분은 대부분 대형 스크린으로 꾸며져 있다.

예배가 점점 자극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인간에게 조금 더 큰 자극을 주기 위하여 더 많고 강력한 멀티미디어를 사용하고 더 비싼 음향 시스템을 구입하며 조명을 사용한다.

예배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마치 예배의 목표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찬양팀의 악기와 싱어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 가고 있으며 스크린에서는 바로 눈앞에 있는 찬양인도자와 설교자의 모습들이 커다랗게 생중계되고 있다.

찬양팀에게 집중되어 있는 조명은 찬양팀 단원과 회중들 모두를 무대와 관중의 구도로 생각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조명과 음향, 찬양팀과 찬양인도자들의 자세와 위치, 설교자의 자세와 설교의 내용, 이런 모든 것들은 예배의 단순한 구성 요소만이 아닌 예배의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는지 아니면 우상에게 드려지고 있는지를 판가름한다. 이런 노력들이 과연 성경이 말씀하는 예배의 요소들을 잘 담아내고 있는 것일까?

이런 것들이 하나님 중심적인 것인가 아니면 인간 중심적인 것인가? (교회 안에서 공연을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창조성을 발휘하여 연극, 뮤지컬, 콘서트 같은 공연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공연도 넓은 의미에서 예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회중이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공동의 찬양과 공연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도 집회와 예배도 차이를 두어야 한다고 믿는다.

좋은 예배에는 전도의 요소가 있게 마련이지만, 전도 자체가 예배의 주된 목적이 될 수 없다.)

3-3 / 개인주의

이 세상왕국의 영화를 좇을 때 우리는 개인주의에 빠지게 된다. 예배는 골방의 예배가 있고 공동체 예배가 있다.

우리가 홀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그 소중한 시간이 있는가 하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이 예배의 양면은 그 어느 하나도 빠질 수 없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을 찾으셔서 기도하셨듯 우리도 한적한 곳에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기도의 시간을, 예배의 시간을 갖고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공동체인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고 공동체 안에서의 삶, 공동체의 예배가 필요한 존재이다. 고독 없이 공동체가 있을 수 없고 공동체 없이 고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점점 더 개인화되어가고만 있다. 공동체성이 결여되고 있다. 성경 말씀도 지나치게 개인화하여 해석한다.

“너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를 “내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로, “너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셨다”는 말씀을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셨다”는 말씀으로만 해석하려 한다.

개인의 구원을 넘어서서 이 온 세상의 구원, 온 인류와 온 문화와 사회 모든 분야의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 혼자 구원받으면 그만이다

. 이웃도 없고 사회에 대한 책임도 없다. 서로를 배려함이 점점 더 사라지고 개인의 비전, 개인의 신앙, 개인의 성공만을 추구한다.

하나님께서 나 개인에게 주신 비전은 구하지만, 교회 공동체에 주신 비전은 주로 구하지 않는다.

이런 신앙의 개인화는 예배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개인의 영성(찬양인도자, 설교자)을 지나치게 의존한다. 찬양인도자가 올바로 서고 설교자가 올바로 섰을 때에는 예배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지만 그들이 올바로 서 있지 않으면 그 예배 자체가 위험에 빠지기 쉽다.

함께 말씀을 읽는 교독문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예배자/회중의 참여도가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 모두가 함께 드리는 찬양곡의 선곡에 있어서도, 함께 찬양드리기 어려운 곡들, 곧 찬양팀만이 누릴 수 있는 음악적 장르로 선택되는 경우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서양의 contemporary 음악만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음악으로 오해되기 쉽다. 찬양인도자는 회중의 목소리를 들어가며 그들을 섬겨야 하는 위치에 있지만, 예배의 장소에서는 회중의 소리를 듣기 어렵고 찬양팀의 소리로 가득할 경우가 허다하다.

3-4 / 일 중심주의

이 세상의 영광을 좇을 때 우리는 일 중심/성공 중심이 되어간다. 예배는 우리 존재의 목적이다. 예배는 우리 삶의 중심이자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예배는 점점 수단이 되어가고 있으며 예배가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산다. 예배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하여 예배한다.

일의 원동력을 찾기 위하여 예배를 드린다. 드리는 예배에서 얻어가는 예배로 변질된다. 예배가 일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아니면 일이 예배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일이 예배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오히려 성경의 메시지이다

. 적어도 성경은 일과 예배의 조화와 균형, 리듬을 보여준다. 인생의 여정에서 돌단을 쌓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예배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에서, 또한 새벽 미명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꾸준히 찾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에서 일/노동/사역과 예배의 리듬과 조화를 볼 수 있다.

4 / 나가며

우상숭배는 구약시대만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다. 구약시대의 인간은 우리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도 우상숭배는 상관없는 개념이 아니다.

우상숭배는 우리와 항상 가까이 있다. 예수님도 우상숭배의 유혹을 받으셨듯 우리는 항상 우상숭배의 유혹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질문을 다시 한번 해 보아야 한다. 나의 예배의 대상은 누구인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누구인가?

 

조준모 [한동대 언어학 교수 ㅣ 예배인도자 ㅣ CCM아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