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워십리포트

현지 문화에 적합한 예배 글로컬워십 _김재우 선교사

항상 주기만 하는 당신, 받아야만 하는 나

Come, now is the time! 글로컬워십 연재를 시작하며

비교적 최근에 미국에서 역동적인 예배사역으로 잘 알려진 한 교회에서 글로벌워십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교회에서 제작한 예배음반에 실린 곡들을 전세계에 수출하기 위해 10개가 넘는 나라의 영향력 있다 하는 예배인도자들을 선정하고 이 음반의 전곡을 각 국가의 예배인도자들이 자국어로 번역하여 음반을 만들도록 했다.

모든 제작비는 이 교회에서 100% 지원했고 심지어는 전세계의 예배인도자들을 비행기로 모셔와 최고 시설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음반이 출시되었을 때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에 참여한 모든 예배인도자들을 미국으로 오게 해서 온 열방이 주님을 예배할 것을 기뻐하는 축제의 예배를 드렸다.

나도 그 과정과 결과를 옆에서 지켜보며 한편으로는 기뻐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복음은 항상 문화의 옷을 입고 전해진다.

그래서 많은 경우 복음의 수혜자들은 타문화에서 온 선교사들이 전해준 문화까지 지키고 보전해야 할 신앙의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은 결국 내 문화와 상황에 적합하게 정착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다시 나를 통해 타문화권으로 전해져야 하는데 이 과정은 정말 순탄치 않다.

‘경배와 찬양’ 운동을 ‘노래를 통한 예배갱신운동’이었다고 볼 때, 예배갱신운동의 주역들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호주의 예배인도자들과 송라이터들이었다.

그들은 지난 20여 년간 한국교회의 예배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는 당연히 그들이 우리보다 예배의 전문가들이라 생각했고, 그들의 노래와 그들의 사역방식을 맹목적으로 추종해 왔다.

과연 그런가? 그들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베끼고 추종해야 할 예배의 본질과 성숙한 예배사역을 갖추고 있었을까? 그들의 예배는 전세계적으로 수출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었고 나머지 세계의 교회들은 그들의 예배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야 할 만큼 예배에 있어서 미개했을까?

예배선교사로 여러 나라를 여행해 보면 복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예배공동체가 생겨남을 목격하게 된다. 복음이 심어진 교회는 어디서나 예배한다. 가장 적합한 예배는 현지의 문화와 상황에 적합한 예배라 할 수 있다.

미국의 메가처치에서 엄청난 인력과 자본을 들여 제작한 최고의 예배음반은 미국의 문화와 상황에 적합한 예배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전세계의 예배자들이 서구의 예배를 통해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를 성립할 수는 없다.

주류문화권(dominant culture)에 있는 사람이나 집단이 범하는 일반적인 실수는 상대를 변두리 문화권(marginal culture)으로 설정해 놓고 그들은 항상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할 수혜자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선교계에선 이미 제3세계를 Third World가 아니라 Majority World라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예배사역에 적용해 보자. 나는 그들의 순전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글로벌워십 프로젝트를 진행한 미국의 대형교회에 이렇게 도발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싶다.

“왜 당신들은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예배에 있어서 우리가 당신들의 도움을 필요로 할거라 확신하는가?”

“우리에게도 이미 한 세기 이상 쌓아온 예배의 유산이 있고, ‘경배와 찬양’ 운동이 한국에 소개된 지 25년이 넘었는데 무슨 근거로 당신들의 예배(노래)가 우리에게 더 적합할거라 생각하는가?”

“왜 당신들은 글로벌워십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를 섬기겠다고 하면서 현지에서 우리나라에서 십수년간 사역한 우리 사역자들의 자문을 구하지 않았는가?”

“왜 당신들의 예배에 있어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나?”

“무슨 근거로 당신들의 예배를 전세계로 수출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가?”

“왜 당신들은 글로벌워십 프로젝트를 하면서 여러 나라의 예배인도자들과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오히려 당신들이 놓치고 있는 예배의 관점과 경험을 더 발전시키고 성숙해질 기회를 추구하지 않는가?”

예배에 대한 관심에서 예배자에 대한 관심으로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일대 혁명을 일으킨 “미디어가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는 말이 있는데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메시지를 받는 사람에게 있어서 메시지 이해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다. 무엇을 전하는가는 어떻게 전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예배의 본질적인 가치를 나누신 요한복음 4장을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렌즈를 끼고 보면, 예수님은 단지 예배자는 ‘영과 진리로(in Spirit, in Truth)’로 예배하라는 말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님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예배의 가치를 전하기 위해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이라는, 당시에는 기절초풍할 만큼 큰 문화충격을 일으킬만한 시청각 교육을 시도하셨고, 그 여인을 예배의 자리로 초대하기 위해 적어도 인종(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 사회적 신분(유대인 랍비와 과거가 있는 여인) 간에 존재하는 엄청난 장벽을 뛰어넘으셨다.

이 본문을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verbal communication)만큼이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비언어적 의사소통(nonverbal communication)을 통해 우리는 예배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예수님의 예배에 대한 본질적인 관심은 잘 기획된 예배(well planned and produced worship service)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아버지를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들(true worshippers)의 배가이다. 예배인도자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예배를 인도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인도(leading people)하는 것이다.

예배사역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 즉 사람에게 있어야 한다. 예배에서 소외된 사람과 예배에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들, 예배는 본질적으로 그 방향에 있어서 관계적이며 선교적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예배를 소통하기 위해 타문화권 선교라는 상황과 문화를 선택하셨다. 이 둘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예배인도자라면 이 부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예배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나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 새로운 예배의 시대가 도래하셨음을 선포하셨다.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일은 예배공동체를 통해 구현되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과연 그런가?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인종과 신분을 뛰어넘어 예배공동체가 구현되는 일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고 항상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얼마 전 달라스 남쪽에서 탁월한 도시선교를 하고 있는 옥클리프성경교회(Oak Cliff Bible Church)에서 불법이민자 사면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차 방문했는데 바로 이 교회의 탁월한 설교가인 토니 에반스(Tony Evans) 목사는 1960년대까지도 남침례교단에서 흑인이란 이유로 설교할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은 남침례교단의 총장이 흑인일 만큼 변화가 일어났지만,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킹이 말한 대로 주일 오전11시(대예배시간)은 여전히 전세계적으로 가장 인종과 신분의 차별이 극명하게 일어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친구이자 동역자인 조쉬 데이비스(Josh Davis)는 탁월한 백인 예배인도자이다. 그는 수많은 나라에서 온 난민들이 살고 있는 조지아 주의 클락스턴이란 동네로 아내와 4명의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들어가 다민족 예배사역을 하고 있다.

집을 오픈하고 동네 교회를 빌려 난민들과 다민족들과 함께 예배하고 있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초대하든지 찾아가든지 하게 하는 불가항력의 힘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 단체의 이사(board)로 이 사역을 돕고 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백인이 이끄는 사역에 내가 이사로 참여한 적이 있던가? 나의 영적 판단을 신뢰하고 내가 제시하는 방향에 순종하겠다고 나선 백인을 본 적이 있던가? 반대로 생각해 본다.

나는 흑인과 남미, 동남아, 또는 우리가 선교지라 부르는 곳에서 온 예배인도자들을 영적 지도자로 인정할 수 있을까? 몇 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달라스의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예배를 인도하면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그들과 이민자라는 신분으로 살아온 나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는데 우리는 항상 도움이 필요한 위치에 있으며, 주류문화에 초대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신앙공동체라 해도 말이다.

땅끝과 끝날을 향하는 예배로의 초대

이라는 영화는 흑인 감독이 제작한 영화이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사죄하는 영화가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을 자기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영화이다. 예배를 말하면서 가해자 피해자 운운하는 것은 다소 지나칠 수 있고 과격한 표현일 수 있겠다. 하지만 선교의 역사는 아름다운 희생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비인격적 사역의 슬픈 반복이기도 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만민의 구주 예수의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있는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이렇게 아름다운 찬송을 지은 클레보의 버나드(Bernard)는 놀랍게도 십자군운동을 지지하는 설교로 선방에 섰던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것은 사실 역사를 통해 반복되어왔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일이다.

몇 년 전 호산나 인테그리티 음반사를 시작해 전세계에 미국의 예배를 수출해 온 마이클 콜맨 회장을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고백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아시아의 예배인도자들이 미국의 유명한 예배인도자들을 똑같이 흉내 내며, 심지어는 제스처와 멘트까지도 따라 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예배의 정신을 나누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의 예배문화를 수출했으니까요.

예배시장은 너무 빨리 성장했고 우리는 빠르게 성장하는 예배문화와 시장에 대처하기 바빴습니다. 그중 성급한 결정들을 내리기도 했었지요.” 그는 후회한다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그동안 해왔던 사역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가르쳐주고 계신 예배의 중요한 가치는 인종과 사회적 신분의 차별이 없이 누구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예배공동체에 초대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워십인사이트의 새로운 코너를 시작하면서 자본이 주도하는 시장경제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글로벌워십(global worship)보다는 전세계인 모두가 기여자이자 수혜자인 글로컬(Glocal)워십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플랫폼을 통해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일한 방향과 마음을 품고 열방의 변두리에서 메마른 땅을 기경하고 있는 사역자들과 그들의 사역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 글로컬 예배로의 여행을 함께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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