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처럼 죄의 유혹이 기승을 부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끝까지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의 답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겠다고 굳게 결심하지 않으면 결코 복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죄의 유혹에 직면하더라도 그분께 복종하겠다고 굳게 결심해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한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가 직면하게 될 가장 큰 문제는 시편 119장 113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_시 119:113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라고 했다. ‘두 마음을 품는’double-minded으로 번역된 형용사는 열왕기상 18장 21절에 ‘둘 사이에서’로 번역된 말과 어근이 같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우상인 바알보다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따르라고 요구했다. 그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라고 외쳤다.
두 마음을 품는 사람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으나 온전히 그분만을 섬기고 예배하기로 결심하지 않은 사람,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과 세상을 둘 다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은 신앙의 유익을 기대하면서 동시에 죄의 즐거움을 사랑한다.
시편 기자는 그런 사람을 미워한다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만큼 두 마음을 품는 사람들을 미워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자신이 미워했던 두 마음을 발견했던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116절) 죄를 짓지 않도록 “나를 붙드소서”(117절)라고 하나님을 향해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을 리가 있겠는가?
이 말씀은 맥클라렌의 설명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과 두 마음을 버리려는 결심을 고취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했던 시편 기자의 강한 결심과 의지를 좀 더 생생히 이해하려면 쉽게 미온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부패한 성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려는 결심이 필요했다면 우리도 그런 결심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야고보는 자신의 편지를 읽은 성도들에게 의심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구하라고 권면했다.
그는 의심하는 자에게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7,8)라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이리저리 흔들린다. 세상 즐거움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빼앗는다.
하지만 상황이 꼭 절망스럽지만은 않다. 자신감을 가질 만한 근거가 충분히 있다. 우리의 자신감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두 마음을 품지 않으시며 늘 신자의 편을 들어주신다.
-로마서 12장2절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장16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신명기 6장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