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밴드가 글과 같다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지금이 우리는 글의 결론 부분인 것 같습니다.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 된 것이지요'
의식은 모든 곳에 펼쳐져있다. 우리는 그것을 평범한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축하해주고, 누군가 죽으면 애도하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삶이 의식으로 덮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연히 우리들의 예배도 풍부한 의식과 함께하고 있다.
새신자가 오면 그들을 환영하고 함께 도넛을 먹는 시간이 있고, 로큰롤 밴드의 찬양, 광고를 보는 시간도 있다. 파이프 오르간으로 찬송가를 연주하는 시간과 평화를 축원하는 시간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의식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져서 일까? 모든 리더들이 고민하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체 언제쯤 이 변화를 줘야 하는걸까?” 무언가를 새롭게 도입하려고 하거나 무언가를 폐지하려고 한다면, 그 시간은 더 이상 우리 공동체에 의미가 없는 것일까?
데이비드 크라우더 밴드(David Crowder Band)는 지난 몇 년간 이 문제와 씨름해왔다. 그리고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데이비드 크라우더와 그의 밴드가 함께 떠나는 마지막 여행의 마지막 구간을, 그리고 새로운 방향의 끝을 보여주는 그들의 음악을 말이다. 이제 그와 대화를 나눠보기로하자.
대화의 주제? 우리는 과거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의식들을 바꿔야 할 때가 언제인지도 알아볼 것이다.
데이비드 크라우더 밴드가 자신들의 마지막 음반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많은 팬들은 꽤 놀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그 마지막 작품이 포괄하는 규모와 범위였다: 총 90분에 달하는 두장의 CD에 34곡의 트랙들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예배 음악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배에 쓰일 레퀴엠(Requiem: 죽은 사람을 위한 장송곡 -역자주)을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완성한 것이다.
초기 기독교에서 사용한 레퀴엠이란 말의 의미는 영혼의 안식에 대한 축하였다. 이와 같은 의미를 담아 데이비드 크라우더 밴드는 자신들의 마지막 작품을 만들었다. 고마운 일이 아닌가? 그것은 ‘행복의열쇠’다.
슬프고 우울하기만 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데이비드 크라우더 밴드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의 첫 번째 CD는 고전적 찬양의 모습을 띄었지만, 그 내용은 새로운 것들로 차있었다.
몇 년 간 그들은 블루그래스(Bluegrass: 미국 남부의 컨츄리음악 –역자주), ‘교회 음악’(Church Music)에 심취해왔고 현재 이 앨범을 발매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런 질문을 받는다고 말했다. 최근 나타나는 현대 예배의 모습은 교회의 역사에 관한 관심과 존중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냐는 질문 말이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복잡성(Complexity)에 관한 인식의 부족입니다.”
크라우더는 자신들의 음악에 관해 설명했다. “수많은 오래된 예배 의식들이 장엄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무언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예배는 여행과도 같았거든요. 당신이 예배 음악의 절반만을 팝(Pop)으로 채운다면, 모든 효과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당신은 많은 현대 예배의 장에서 팝이라는 장르를 사용할 수 있고, 이것은 어떤 혼란도 주지 않을 거예요.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길을 잃은 것 같이 보이기도 하죠.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그 음악이 매력적이기 때문인데, 더 엄밀히 말하면 당신이 그 음악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모든 일에 관해 그것이 실제 일어났는지 다 알 수 없어요.
나는 예배에 흥미를 주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불가사의한 일이고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죠. 그건 정말 복잡한 일이거든요.”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것이 크라우더 혼자만의 견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음 세대의 예배자들(그들은 다음 세대의 리더가 될 것이다)은 이미 우리의 예배에서 허용하는 것보다 더 멀리 과거의 형식으로부터 벗어나있다. “우리는 많은 대학생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크라우더는 말을 이어갔다. “제가 사랑하는 것은 그 학생들이 자신보다 큰 무언가를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가길 원한다는 점입니다.
현재 자신이 어디에 있든 간에 말이지요. 물론 그것이 우리의 신학이나 삶에 적용할 신학적인 새로운 차원은 아니에요. 다만 거대한 사회적 트렌드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요.
거대한 어른들의 공동체 틈에서 새어나오는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젊음을 불태울 수 있는 마켓이 필요합니다. 단지 물건을 소모하는 그런 곳이 아니라, 열정을 소모하는 곳 말이에요.”“
그리고 이 젊은 세대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길 원하는데, 그 순간은 항상 충분하지 못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단순히 ‘현재’라는 것보다 더 큰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현재보다 더 큰 무언가에 관해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고 우리가 했던 말을 수정해야 합니다. 충만하지 못한 현재에 이르게 한 말들이니까요.
그러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역사가 우리와 함께하니까요.”불가타 성서로 돌가자고?(Back to The Vulgata?) 하지만 크라우더는 인정한다. 그 신비 중 어떤 것들은 예배 시간에 나타나는 언어 이외의 것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은 언어보다 더 큰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의 많은 신앙인들이 공감하는 것처럼,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역시 이 문제에 관해 강하게 언급했다. 우리는 예배 의식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상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지 발견하는 시간을 갖는데, 이 현대적 문제는 전통적인 문제들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언제 오르간과 기타를 교체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우리는 무엇이든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통해 예배할 수 있나요?” 크라우더는 말한다. “뮤지션이자 사람인 우리가 다른 생각과 다른 소리에 관해 연구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예배를 인도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르쳐줄 것이지요. 만약 ‘가장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것’만이 동기라면, 그것은 스스로에게나 듣는 사람들에겐 결국 인위적인 느낌만을 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해 물으며 그렇게 발견한 우리의 고유한 음악으로 찬양할 때, 진정한 찬양이 울려 퍼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자신을 찾는 일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단계까지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동기를 바꾸는 것 자체로도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 그것은 결국 처음과 완전히 상반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예배를 준비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이 인위적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점입니다. 당신이 가고자 하는 순간이 있고 당신에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어요. 당신에게 다가오는 그 순간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결국 그 일을 하는 동기로부터 비롯된 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식을 무너뜨리는 것이 배신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기존의 것을 버리는 일이 죄라고 느끼니까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는 새로운 미디어를 만들거나 기존의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공동체 구성원들의 고유한 스타일을 찾아주고, 그들의 은사가 교회를 위해 쓰일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일이 잘 이루어진다면, 당신은 배신이라는 잘못된 감정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Saying Goodbye 워십리더로서, 목회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신실하게 마음으로 헌신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저 해왔던 일을 반복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크라우더의 말과 같이, 그것은 확실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크라우더 밴드가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들이 최근에 더 심화되었다는 점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의식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시작했다.“특이하게도 우리는 긴 시간 동안 여섯 장의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여섯 장의 음반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저 앞으로 무엇을 할까에 관해 이야기할 뿐이지요. 하지만 이 마지막 음반을 낼 때에는 조용히 앉아 생각하고 기도하며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할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계속해서 이 일을 할 것인지, 새로운 무언가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결정했어. 이게 우리의 마지막 작품이야. 마음은 아프지만 여기까지야.’라면서 말이지요.”“하지만 이 무서운 소리만큼이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인생의 막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밴드가 글과 같다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지금이 우리는 글의 결론 부분인 것 같습니다.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 된 것이지요. 하지만 모든 것이 멈추면 새로운 글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글은 지금까지 써보지 못한 최고의 글이 되길 소망합니다.”
레퀴엠(Requiem) “이제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더 많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크라우더는말을 이어갔다. “많은 사람이 음악을 만들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이미 자신만의 곡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니까요.
앞으로 저는 계속해서 이 일과 연관된 일을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교회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돕고 섬기며, 계속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지요.”우리의 모든 의식, 그중 가장 복잡한 의식 중 하나는 바로 안녕이라고 말하는 시간(Time to Say Hello)과 잘 가라고 말하는 시간(Time to Say Goodbye)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크라우더 밴드는 자신들의 마지막 앨범인 (A Requiem Mass In C [The Happiest Of AllKeys])를 통해 마지막 인사를 전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성찬(Eucharist)이 있습니다.” 크라우더는 마지막으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생각할 때 성찬은 마지막을 장식할 가장 완벽한 순서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으로 돌아온 거죠. 저는 저희 글의 마지막에 찍을 마침표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희생 그리고 우리와 함께 거하심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그리스도와 그가 이루신 승리에 초점을 맞추며 자신의 창조적 사역을 해 나가는 데이비드 크라우더 밴드는 이와 같은 신실한 신앙으로 충만해있었다.
그가 찍은 마침표를 느낌표(!)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 Jeremy Arm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