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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테마
오늘의테마

또 드러났습니다.

 2016-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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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믿음 있는 자는 율법의 조문을 다 지키고 온전히 행하거나 또는 피 터지게 노력해서 자신을 도와줄 메시아가 필요 없는 자일까? 아니면 늘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 됨밖에는 볼 수 없어서 예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엎드려 간절히 그분의 도우심만을 바라는 자일까? 언제까지 율법의 행위로 의로운 모습이 나타날 때까지 당신의 믿음의 걸음을 보류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었다고 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연약함을 거두어가지 않으신다. 또한 이전에 없던 연약함이 생기는 것을 막지 않으신다. 왜일까? 우리가 믿었다면 점점 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성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또 다른 연약함 앞에 부딪힌다. 나이가 들수록 성품이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연약해지고 비겁해지며 치사해진다. 이런 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어떻게 우리의 믿음은 자라가는 것인가? 또 믿음 따로 자라고, 인생과 삶 따로 자라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우리의 육체는 날로 쇠하고 더욱 연약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그럴수록 더욱더 예수님 앞에 나아가게 할 것이다. 성숙한 믿음을 가진 자는 모든 영역에서 이상적인 선택과 결단을 하며 율법적인 기준으로 보아 흠이 없어 보일 만큼 완벽한 자가 아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연약함 때문에 이상적인 선택과 결단을 하지 못해 익숙하게 자신을 도우실 예수님을 찾고 그 앞에 나아가는 자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우리의 육체를 갈고닦는 것이 아니라 더욱 익숙하게 예수님을 찾고 그 앞에 나아가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지금은 뻣뻣해서 그래도 내가 좀 이 어려움을 뛰어넘어보겠다고 발버둥치고 결국 부딪힐 것에 부딪혀 하나님 앞에 “아, 역시 안 되네요”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더 익숙하게 주님을 찾는 것이다.

그러다 더 이상 내가 무엇을 하려는 노력을 하기 전에 무슨 일만 생기면 무릎부터 꿇는 사람, 주님의 도우심을 매순간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 일상에서 익숙하게 주님을 찾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완벽한 모습이든지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이든지 보이는 모습으로 스스로의 믿음과 타인의 믿음을 비교하거나 판단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믿음은 연약함이든 강함이든 이후 예수님 앞에 도우심을 구하며 엎드렸는지와 그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로 판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말라. 이 영역을 나눔으로 인해 우리의 연약함을 합리화시킬 생각은 없다. 연약함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연약함을 정당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아가고자 함이 목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이 말씀처럼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결코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연약함 앞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전한 믿음이며, 예수님을 간절히 소망하고 그 앞에 나아간 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인 온전한 믿음인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해주신 말씀 중에 이 진리를 누리는 삶에 있어서 큰 충격을 주신 말씀이 있었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생각의 패턴, 즉 “믿음으로 해보려고 하는데 안 된다, 나는 연약한 거 안다, 절망이다” 이 똑같은 레퍼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넘어질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존재적으로 한 번 절망한 사람은 두 번 다시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새롭게 나타난 연약함이든 이전에 갖고 있던 연약함이든 내게 연약함이 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릎을 탁 치며 깨달았다. 내가 제정신이든 남의 정신이든 “나는 절망이다. 죽었다”라고 한 고백 속에는 이전에 드러나지 않고 지금에서야 드러나게 된 연약함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의 연약함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니 충격받을 것도, 낙심할 것도 없다. 드러날 것이 드러났을 뿐이다. 오히려 그때에 또다시 주님 앞에 엎드리면 되는 것이었다. “제 연약함이 또 드러났습니다. 이 영역에도 주님이 필요합니다.”

만약 절망을 하고도 이후에 자신에게 드러난 연약함에 또 낙심했다면 어쩌면 여전히 내게 나올 선한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의 절망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절망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소망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다. 약함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약함으로 하나님의 강하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 말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시편 42장 5절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 시편 73장 26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고린도후서 1장 3, 4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요한일서 3장 3절

† 기도
주님, 저의 연약함으로 인해 넘어질 때가 많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주님 앞에 엎드리기를 원합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을 소망하며 나아가게 하시옵소서.

† 적용과 결단
당신의 연약함을 아시고 품으시는 주님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는 삶이 되기를 결단하세요





† 지금 교회와 성도에게 필요해요~